재밌는 현상

1. 글 잘 쓰는 사람이 글을 쓴다.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이 적절하게 들어가있다. 제법 훌륭한 논조이다. 여기서는 그의 "갑씨는 을씨에 비해 3만배 더 노력하여 그러한 결과를 이루었다"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집어보자.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은 글 주제를 수식하는 양념일 뿐, 주제나 주장이 아니라는 것.

2. A가 이 글에 반박한다. 그는 "갑과 을의 데뷔 시기는 비슷하다. 을은 하루 평균 5시간씩 노력을 해왔는데 갑이 을보다 3만배 더 노력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라고 반박을 했다. 글의 형태는 비교적 딱딱해보이고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초 반박의 대상 자체가 반박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반박을 하려면 글의 주제에 대해서 해야지 단지 표현법에 반박을 하는 것은 외모가 범죄형이라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그 사람을 구속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즉 이해력이(심지어는 독해력) 부족하거나 괜한 딴지를 거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3. 문제는 바로 이 부분. A와 비슷한 "수준"을 보이는 일부 애들이 A의 글을 훌륭한 이견으로 떠받들며 동감을 표한다. 애초 시작이 같잖은 A의 글은 토론을 소모적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원 글은 어느 새 파묻혀 사라져있다.

4. 자, 이제 저 글 잘 쓰는 사람은 고민에 빠진다. 사람들이 자신의 어렵지 않은 글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는 모습을 보니 글을 길게 풀어써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자신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을 길게 풀어쓰기 시작한다.

5. A가 비아냥거리며 글의 주제와는 아주 무관한 의사를 표시한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한날님은 잘 생겼다는 말이지요? 글이 너무 기네요" A의 글에 호응을 하던 애들도 동감한다. 또 다시 글의 주제가 파묻힌다.

이러한 현상이 이뤄지는 이유는 내용을 반박하는 것보다 글자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글자에 대해 보이는대로 반박을 하면 된다. 글의 의도와 목적(주제), 글쓴이의 논법을 파악하여 글의 내용에 대해 반박을 하여야 하는데 한국어가 아닌 한글만 배운 수준을 보이는 일부 아이들은 글자만을 훑어보고 글자에 대해 반박한다. 만일 자필 글이었다면 글씨체에 대해서도 반박할 거 같다.

남을 비판할 일만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생산적이지 못한, 아니 유해한 반박을 종종 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매우 유해한 토론 참여법을 보이고 있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은 나와 다르달까. 그러니 자신에게 소모적인 토론을 하지 말자는 말에 그리도 발끈하는 것이겠지. 자신의 의견이 소모적인 걸 모르니 인정을 못하는 거겠지. 이것은 독서와 토론을 가로 막는 우리 나라 교육 체계(비단 교육 기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 교육도 교육 체계에 속한다)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 유통되는 키보드에 신비한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