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에 대한 소고 1

기획의 길을 들어서다

내가 처음 기획 일을 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아마추어 게임 제작자였던 나는 자칭 기획자로서 그래픽 디자인도 하고 음악도 만들고 시나리오도 썼다. 그러나 나는 기획을 하지 못했다. 기획서 같은 문서를 쓰긴 했는데 실제로 개발에 필요한 기획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 매뉴얼(분석 문서)이었다.
실질적으로 기획이라는 것을 맛?것은 지금의 5년 전인 1999년 가을이었다. 보조 기획자로 나는 게임 기획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기획을 하기 위한 게임 개발 공정(Process)의 흐름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기획팀의 팀장님을 통해 나는 기획이라는 것을 많이 깨달았다.

기획 팀장

그리고 게임 기획 팀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봤다. 보는 것이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 보았던 팀장의 역할을 나는 2003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기획 팀장을 깨닫는데 4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당연한 거였다. 나는 기획 일을 분담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혼자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던 것이다. 팀장의 존재 의의는 팀원과의 교류에 있는데 나는 그러한 것을 제대로 겪지 못했었다.
2003년, 사회 나온 지 4년차가 되는 해에 비로소 진한 사회의 맛을 경험했다. 꽤 아팠지만 아픈 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기획과 기획 팀장에 대한 나의 잘못된 주관을 산산이 깨부수고 새로이 수립해나갔다.
내가 정의하는 기획 팀장이란 어떤 사람일까.
기획 팀장은 기획 팀원들의 상사가 아니다. 기획팀에 상사가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기획 팀장은 기획팀의 대표자일 뿐이다. 사회에서 대표자를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이나 직급으로 오인하지만 대표자는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지 권한자와 결정권자가 아니다.
기획 팀장은 기획팀을 대표하여 기획을 타부서에 소통시키고, 다른 팀 간의 의사를 정보로 가공하여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프로젝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이끎의 힘(Leader-ship)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시야와 판단력, 그리고 대화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이해력과 수용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을 시 기획팀의 기획은 더는 새로운 발상이 보이지 않으며, 다른 팀들은 서로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늘 차질이 발생한다.
즉 기획 팀장은 사람을 대할 줄 아는 능력과 무형을 상상하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기획자의 유형

그러나 대다수의 기획자들과 기획 팀장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획 업무를 할 수 있지만 사람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여 다른 팀과 늘 마찰이 일어나거나 심지어는 기획팀 내부에서도 소모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이들을 기획 문서 작성/관리자라고 하면 적절하다.
혹은 사람을 대하는 능력은 좋지만 기획 업무를 진행하여 이끌어나갈 눈과 머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말로 다 해먹는다. 특히 잘못된 시야를 가진 이들은 자신의 시대착오적인 시야를 남들을 앞선 시야라고 크게 착각하곤 한다. 이들은 부정적 의미로써 몽상가라고 부를 수 있다. 늘 허황된 꿈을 꾸고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정말 황당한 유형은 위 두 가지 능력 모두 갖추지 못한 기획자이다. 이들은 단지 감투, 즉 직급이나 업무가 기획이기 때문에 기획자인 경우이다. 이들은 허황된 말을 가지고 고집과 아집을 부리며 기획팀은 물론 다른 팀의 업무 연결(팀원)을 끊어 놓는다. 이들은 사기꾼이라고 보면 된다.
더 황당한 것은 자칭 기획자라는 사람들의 상당 수가 바로 이 사기꾼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무서운 대한민국 현실이다.

기획서

기획 입문자들에게 간혹 듣는 이야기가 있다면 기획을 어떻게 쓰냐는 것이다. 기획서의 양식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획서의 양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기획의 방향이나 목적, 용도, 기획서를 필요로 하는 대상(Target)에 따라 기획서의 형태는 달라진다. 내가 지난 5년간 작성해온 수백 장의 기획서들을 보면 형태의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억지를 부려 공통점이 있는 부분을 찾자면 기획 개요 부분 정도이다. 물론 기획서라는 문서의 외형(Layout)은 필요한 대로 구조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매우 사소할 정도로 간단하다. 표지 - 변경 내용 - 목차 - 개요 - 본문.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정해진, 즉 규격화된 기획서의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기획서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는 존재한다. 그럼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기획자의 취향, 혹은 속한 조직의 취향에 따른다. 그 핵심에는 프로젝트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와 필요한 정보를 유추해내는 이해력에 있다. 프로젝트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획서의 구조는 잡을 수 없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게임 기획 일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광적인 게임 이용자가 아주 훌륭한 기획서를 만드는 광경을 몇 차례 보았다. 물론 그들이 게임 개발에 대한 경험이나 이론이 부족하여 광범위한 기획서 전체(Bible)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게임의 부분에 대한 기획서, 즉 특정 시스템 기획서를 아주 훌륭히 작성해내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 그 시스템에 대해 이해를 하고 흐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스템의 흐름에 맞게 기획서의 큰 제목과 작은 제목을 잡았고, 각 제목에 해당되는 내용을 표나 그림, 그리고 문장을 이용하여 채워나갔다.
상점에 가서 맛동산을 사오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을 기획서로 쓰는 것은 대단히 쉽다. 우선 표지를 만든다. 표지에는 제목과 작성자 정도가 들어가면 무난하다. 변경 내용에는 본 기획서가 언제 어떤 내용이 어떻게 변경되는지를 기록(log)해놓는 것이다. 2004년 6월 3일(언제)에 맛동산 가격이 700원(무엇이)이라는 사실을 추가(어떻게)하는 식이다. 이제 목차를 만들면 된다. 목차는 미리 만들지 말고 큰 제목과 작은 제목 선정이 끝난 뒤에 작성하는 것이 좋다. 문서 편집기의 목차 생성 기능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이제 개요를 쓴다. 맛동산을 통해 즐거운 파티를 하기 위해 6월 4일 오후 4시까지 총 10개의 맛동산이 필요하다고 하면 좋다. 왜 이런 기획을 하고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하며 무슨 내용을 다룰 것인지 정도의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내용이다. 우선 맛동산이 무엇인지 적어본다.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 과자로서 가격은 700원이라는 식의 맛동산에 대한 자료가 기입된다. 젊은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서라면 맛동산은 해태라는 제과 대기업이 만드는 과자로서 불량식품이 아니라는 내용이 덧붙으면 좋다. 이제 이것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을 기재한다. 맛동산은 먹거리를 파는 상점이다. 기업형 할인 매장에서는 10% 할인되어 630원에 구매가 가능하다. 동네 할인 매장에서는 30원은 그냥 빼주어 600원에 구매도 가능하다. 편의점은 정가제를 따르므로 700원을 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600원에 구매가 가능한 동네 할인 매장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이유는 동네 할인 매장의 계산대 아가씨가 예쁘기 때문일지라도 기획 내용과 무관하므로 부적절하다. 총 10개를 구입해야하며 현재 6000원이 있기 때문에 600원에 파는 동네 할인 매장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내용을 적는다. 이제 동네 할인 매장 가는 방법을 기재한다. 동네 할인 매장 이용법, 즉 구매 방법을 적는다. 맛동산 봉지를 뜯는 법을 기재한다. 효과적인 기획 내용의 전달을 위해 표나 그림을 적절히 이용하면 좋다.
이렇듯 일련의 과정을 알면 기획서를 쓰는 것은 대단히 쉽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이해는 하려들지 않고 기획서 양식만 쫓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프로젝트의 흐름을 알고 프로젝트를 이해하면 어떠한 정보를 다루고 기재해야하는지 아주 명확히 알 수 있다. 기획서의 양식을 잡지 못하여 기획 업무의 시작인 기획서 작성을 시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이 기획해야할 일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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