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을 근거로 하는 자신감

영어를 참 못했다. 난 프로그래머로서 사파였던 이유 중 하나는 영어로 된 설명서나 참고서를 읽기 싫다는 것이었다(물론, 호기심 많고 일단 찔러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 가장 크다). 어릴 적에는 하루에(30분) 영어 낱말을 30~50개씩 외우고,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이미 중학교 2학년 과정까지는 별 공부 안할 정도였지만, 공부 해야 할 과목으로 받아 들인 영어에 흥미를 금방 잃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증명되는 내 나쁜 성격. 깊이 파고 들지 않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깊이 파고 들지 않는 성격 탓에 흥미를 잃는 순간 내 성적이 뚝뚝 떨어질 동안 노무현은 무엇을 했나.

한때 서버 관리를 했다. Redhat linux와 FreeBSD였는데, 커널 판올림을 할 때 놀랍게도(무모하게도) 나는 README 파일 조차 읽지 않고 일단 make 부터 때리고 봤다. 서버 관리 자질이 전혀 없는 서버 관리자가 되는 데 아주 훌륭한 실천 정신. 덕분에 한 1주일 폐인처럼 싸우고 나면 전체 흐름을 이해해서 중수와 혀 싸움을 벌이는 건방짐을 보여줄 수 있긴 했지만, 참 체력 소모가 극심한 도전 방식이다. 물론! 이런 피곤한 도전을 했던 이유도 영어로 된 문서를 읽기 싫어서 그랬던 점도 크다. (주 이유는 아니다)

영어를 익혀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지만 호기심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시간은 가고, 비로소 흥미를 갖기 시작한 때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때문”이라는 원인 역할을 해오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사건에 휘말린 얼마 뒤 였다. 신기하게도 영어 원리가 문득 느껴지기 시작했다. Neo가 녹색 매트릭스 코드(Source code) 냄새를 조금 맡더니 감히 Smith 요원과 1:1 맞장을 붙고 바로 피떡이 되게 얻어터지듯이, 나 역시 이유와 근거 없이 영어 기본 원리 일부를 스스로 깨우쳐 영어에게 덤볐다가 자괴감과 우울증만 껴안았다. 그래도 그토록 싫어하던 to가 어떤 냄새를 가지고 있는지 깨닫는 쾌거를 이뤘다. 아, to가 뭐냐고? to 는 → 이다. to 앞에 있는 말이나 앞/현 상황을 다음에 나올 말이나 상황으로 향하게 한다. 잘 어울리는 낱말로는 go 가 있다.

챨리가 초콜릿 공장에서 여러 경쟁자들에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간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둬 신비한 초콜릿 공장 사장이 된다는 책을 원서로 한 달에 걸쳐 읽었다. 그때도 별 생각 없었다. 문득 쉬운 영어 동화책을 읽고 싶었고, 그래서 사다 읽었다. that 절이 있으면 that 앞에서 한 번 끊은 뒤 해석을 하고, to 뒤에 나온 낱말이 동사인지 명사인지 구분하고, 이 have가 have got인지 have p.p인지 알려고 애쓰며 읽다보니 직전 문장 내용을 까먹더라. 어찌 됐건 다 읽고 나자 나는 영어 신(神)이 되었다. 뻥이다. 영어 능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하지만, 하려고 하니까 된다는 묘한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처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단 둘이 폐쇄된 공간에 있을 때 였다. '상상파티'에서 10번, 저녁 먹고 퇴근하냐는 물음을 보내주시는 어머니에게서 2~3번 정도 단문(SMS)을 1주일에 걸쳐 받는 내 휴대전화기를 꺼내 지난 광고나 변함 없는 어머니 물음(“저녁 먹고 와?”)을 읽으며 부디 내게 말을 걸지 않길 바랐다. 내 연기는 환상이어서 그 캐나다 사람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작전 성공이었다. 5분간. 그렇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한 번 두 번 부딪히고, 쉽다고 소문 나 김서방도 사들였다는 영영사전으로 낱말에 담겨 있는 바다 내음과 찬란한 햇볕 속 따뜻함을 가로 지르는 절묘한 맛을 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키워갔다.

지금은 영어로 된 글을 큰 부담 없이 읽는다. 여전히 모르는 낱말이 많고 익숙치 않은 표현이 나오면 멈칫하지만, 영어 문장 형식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문장이 머리 속에 담기는 현상을 겪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전을 찾아 낱말 뜻을 이해하면 문장도 이해하게 되는 바람직한 상황이다. 아주 간단한 문장이나마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면서 날 한 없이 쪼그라 들게 해서 무한 단신을 만들던 그 캐나다 사람과도 어영 부영 얘기를 나누며 지내고 있다. 왜 쟤네들이 저렇게 말을 했는지 스스로 물음을 갖고 답을 찾게 됐으니 대단한 발전이다. (심지어, 지금은 친구가 되어 함께 뭔가를 꾸미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자 영어 능력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를 이끄는 것은 물음(호기심)이고 나를 밀어주는 것은 스스로 답함(자신감)이다. 그런데 막상 내뱉으려고 하면 쉽게 되지 않는다. 자신감에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걸까? 스스로에게 되묻는 순간 목젖이 목 안에 있는 소리길을 틀어 막는다. 나로 하여금 내뱉게 하는 것은 믿음(확신)인데, 스스로를 차마 믿지 못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함, 즉 자신(自信)하지 못하니 감(感)이 떨어지는 당연한 현상.

옳다는 확신이 있고 실제로도 옳으며, 그 확신을 기반으로 발하는 건전한 자신감은 호기심을 살린다. 옳음을 분간하고 다듬을 줄 알며, 가슴 속에 새겨 내 것으로 만들어 확신이라는 예쁜 놈을 만들려면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영어 공부 방법으로 사기를 쳐 수 많은 사람들을 뻘짓하게 만들었다는 정모씨의 아들, 모찬용씨의 분홍색 책도, 따지고 보면 방법을 떠나서 그 책 내용대로 그렇게 열심히 하면 자연스레 길을 볼 수 있게 된다. 흔한 말로 도를 깨우친다.

배움을 좇고 배움에서 자신감을 얻어 물음에 답하는 깨달음. 애초 물음이 없다면 시작될 리 없는 흐름이지만, 물음이 있다면 확신을 근거로 하는 자신감을 잡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작은 깨달음에 새삼스레 흐뭇해하고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조금씩 계속 나아간다.

2007.02.08. 0시 8분에 덧씀 : 영어도 되고 글도 되고 기획도 되는 개발자 스카웃하실 분 보시라고 합니다. 이곳을 말이죠. 다들 보세요. 아닌게 아니라 저 요즘 한가해요(?)~!
으하하하하, 멋지지 않습니까? 만박/체스터 팬모임 1기 회장을 챙기는 저 모습을 보십쇼. 팬은 이렇게 관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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