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시간과 상황에 좀더 녹아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흐르는 시간이 고맙고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이 고맙고 함께 시간을 겪으며 같지만 다른 기억을 갖는 게 고맙다.

10대 땐 숙제 때문에 쓰곤 했지만 결국 귀찮아서 안 썼고,

20대 땐 성공하는 사람이 쓴다길래 쓰려 했지만 결국 귀찮아서 안 썼던 일기를,

30대 나이에 익숙해지는 요즘 들어서 고마움을 쏟아 뱉어낸 마음이 증발되지 않게 담아두려고 쓰고 싶어졌다.

일기를 쓰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인데, 이상하게 그 욕구는 마음을 아리게 하고 서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발맘발맘 흔들려 쓰려는 일기가 아니라 나를 복사하고 싶은 마음이라 아리잠직하다. 민망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리고,

일기를 쓰려는데 이렇게 복잡한 마음이 들 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도 내가 이 모양, 그러니까 일기 쓰겠다면서 천 갈래 마음에 뒤흔들리는 그런 꼴로 멍청하게 컴퓨터 앞에 앉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