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스타트업 창업가의 흔한 일기

운이 좋았다.

  1. 돈 한 푼 없이 창업을 했는데
  2. 얼마 후 4,000만원 짜리 외주 프로젝트 제안을 받아 완수하여 자본금을 마련했고,
  3. 법인 설립하고 얼마 후 좋은 팀을 만나 서로 합병하여 더 강한 팀으로 거듭났다.
  4. 그러자 국내 최대 온라인 게임 회사인 넥슨이 불쑥 나타나 우리를 투자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운이 좋았고 참 쉽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당시로 돌아가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어쨌든 나, 우리는 살아남았고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고 있다.

난 1990년대 중반부터 인디 게임 개발자[1]로서 활동을 시작한 게임 개발자이다. 2000년에 게임 개발사를 창업했다가 3년 만에 쫄딱 망해본 사업 경험은 있지만, 여전히 사람 만나는 게 수줍고 사업 기획보다는 게임 기획할 때 깊게 몰입하는 게임 개발자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외라는 말을 하곤 한다.

첫 창업은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못 한 최악 경험이었다. 단지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싶어 창업했고, 창업하고나서도 게임만 만들 뿐 내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사업 경험도 제대로 쌓질 않았다. 실패할 적기(?)도 놓쳐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쳤다. 그래서, 두 번째 창업을 할 때 첫 창업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 사실상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첫 창업은 날 자산가(비록 부채 뿐인 자산이었지만)로 만들어주기만 했을 뿐 정말 필요한 걸 쌓는 경험이 되질 못 했다.

냉정히 따져보면 운은 두 번째 창업 때보다 첫 번째 창업 때가 더 좋았다. 창업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기업의 회장으로부터 5:5 지분을 대가로 투자하겠다는 제안도 받았고, 창업하고나서는 모 대기업으로부터 투자 유치할 뻔도 했다. 시연할 만큼 게임을 개발하지도 못 했는데 여러 유통사로부터 제안을 받기도 했고,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받아 산업기능요원을 고용할 수도 있었다. 이외에도 무수한 운이 나를 따랐다. 그러나 망했다.

두 번째 창업은 내게 찾아온 운보다 10배는 더 많은 고난이 따랐다. 망할 뻔한 위기도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만 2년을 넘은 지금 우리 회사 플라스콘은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조금씩 더 단단해지며 성장하고 있다. 첫 사업 2~3년 차를 맞이했던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대체 차이가 무얼까? 왜 운이 훨씬 좋았던 첫 창업은 만 2년 차에 접어들 때 이미 거의 망했고 두 번째 창업은 오히려 단단해지고 상황이 나아지는 걸까.

이쯤에서 내가 운이라는 단어를 기회라는 단어와 혼용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용한 운이라는 단어는 행운(luck)이 아니라 기회(chance)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운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차이는 운을 잡아내느냐 그대로 흘려보내느냐 정도이다. 우리를 찾아오는 이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토양으로 쌓은 사람은 결국 꿈을 이루는 과실을 따내는 것이다.

나를 찾아온 기회를 언제나 알아보고 잡아내어 담아내고 다룰 능력과 그릇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동안  못보고 보낸 기회는 얼마나 많을 것이며, 기회인줄 모르고 잡았다가 덧없이 날린 기회는 얼마나 많을 것이고, 심지어 기회를 위기로 활용한 때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삽질하기 싫어 일기를 쓰듯 그때그때 있던 일을 블로그에 글로 남기려 했지만, 그때그때 일은 그때그때 맞이하고 어르고 다뤄서 해치우느라 남길 손가락이 부족했다. 입이 부족했다. 마음이 부족했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인데도 그 실체를 느끼고 깨달아 꼴과 속을 글로 다루기 너무 어려웠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한발자국 물러나 바라보자 그때 일은 지난 일이 되어 못난이인지 예쁜이인지 그제서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제, 
되짚은 발자국 개수만큼 내 눈을 가리우는 현실이라는 가리개를 걷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창업과 사업 이야기를 남겨야겠다.


1.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시엔 인디 게임 개발자라는 아니라 아마추어 게임 개발자라는 표현이 거의 대부분 쓰였다. 물론, 나 역시 아마추어 개발자라고 스스로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