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마치며

어째 이 블로그에 회고만 올리는 것 같다. 1쪽에 2년치 회고가 나란히 나열되는 게 민망하니 2022년엔 분발해야겠다.

몸 건강

작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진 몸을 치료하고 재활했다. 연초에 필라테스를 시작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다니고 있는데, 운동 수행 능력은 거의 안 는 것으로 보인다. 직업병은 다소 나아졌다.

올해엔 백신을 여섯 방 맞았다. 코비드19 세 번, 독감 한 번, A형 간염 두 번. 이 정도면 우리 동네 백신대장 정도는 되겠지? 코비드19 1차 접종은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2~3일 감기몸살 앓는 정도로 지나갔고, 2차 접종은 감기 기운 도는 정도로 지나갔고, 3차 접종은 내 왼쪽 어깨에도 근육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정도로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어느 백신이든 난 부작용을 안 겪거나 거의 안 겪는 것 같다.

정신 건강

연초부터 개인사가 겹치며 제대로 정신이 털렸다. 그 시기엔 혼란스럽긴 해도 정서나 정신 체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고 여겼는데, 내게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2분기에 깨달았다. 두드러진 증상은 집중력 저하와 의욕 감소, 상황 과소 평가와 나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 그리고 수면 장애였다.

한 달 정도 쉬니 기분이 다소 나아졌지만, 집중력 저하와 수면 장애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ADHD인데…”라고 ADHD인 지인이 내게 한 말도 있고 해서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ADHD 의심 진단을 받고 약을(콘서타) 먹기 시작했는데, ADHD 사람들이 말하는 극적인 변화는 아쉽게도 경험하지 못했다. 차이가 있긴 있다.

수면 장애는 좀 더 차이나게 약 효과를 봤다. 효과를 빠르게 봐서 수면제인 줄 알았는데 우울증 약이라고 한다. 평소 우울감을 모르며 지낸다. 정확히는 기복 없이 낮고 평평한 감정과 정서를 유지하며 산다. 하지만 우울감이 도드라지지 않은 것일 뿐 뇌에선 우울증이 일어나는 호르몬 변화가 있었나 보다. ADHD약은 조금씩 증량해서인지 소문과(?) 달리 천천히 변화를 체감하고, 우울증약은 빠르게 효과를 봤다. 과거형인 이유는 식욕 부진이 심해져 약을 바꿨는데, 식욕 부진은 해소됐지만 수면 질이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취미

정신과에 가기 전에 정신 건강 회복을 위해 새로운 취미 활동을 시작했다. 실용음악학원에서 보컬과 드럼을 배우는데, 드럼은 좋아하는 악기여서 선택했다. 보컬 수업은 목 안 쉬고, 편안하게 말하면서도 전달력 있는 목소리로 대화하고 싶어서 등록했다. 스피치 학원을 가는 게 맞지만, 온라인에서 스피치 관련 강의 몇 개를 들어보니 나와 안 맞아서 출석을 제대로 안 할 것 같았다.

드럼 수업은 재밌는데, 안 그래도 사지가 동기화 되어 움직여서 답답한데 악보 읽느라 박자 따라가기도 벅차다. 생소한 문법이나 패러다임인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된 코드를 읽는 느낌이다. 음표를 봐야 하는데 음표 간격으로 박자를 세는, 눈이 본질이 아닌 것에 현혹되는 함정에 자꾸 빠진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하고 재밌다.

보컬 수업은 의지력을 꽤 발휘하며 출석하고 있다. 난 내 목소리가 탁성에 톤이 낮다고 생각했는데, 탁한 음색은 아니며 탁한 소리가 나는 건 발성이 좋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그리고 음역대가 남성 평균보다 조금 높다는, 생전 처음 듣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걸 느꼈는지 바리톤 치고는 조금 더 높다는 것이지 고음 또는 초고음역대는 아니라고 부연해주었다.

집중의 질

ADHD약을 복용하면서 집중하는 질이 좋아졌다. 여전히 극적인 변화를 체험해보진 못했다. 과열된 CPU의 클럭을 낮춰 다소 느리게라도 동작하는 것처럼 내 두뇌는 더 느려진 것 같다. 초반엔 시간이 빨리가는 건 체감해서 집중력이 좋아져 몰입하니 시간이 빨리간 것인가 싶었는데, 좀 더 관찰해보니 아니었다. 엄청난 중력이 미치는 공간에 내가 들어서서 내 시간선이 느려진 느낌에 더 가깝다. 다른 시간선은 다를 바 없는 속도인데 내 시간이 느려져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내 사유체는 여전히 불쑥 끼어드는 다른 생각이나 사건(event)에 쉽게 붙잡혀 끌려간다. 그래서 초반엔 무능감이 커졌다.

그럼에도 약효가 있다고 여기는 이유가 있다. 사유체가 어딘가로 끌려가는 상황을 예로 들면, 예전엔 순순히 투항한 것처럼 그대로 동행했다. 약 복용하면서부터는 즐겁게 따라가다 뿌리치고 다시 원래 맥락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는 사건이 포착된다. 약 용량을 늘려가자 실은 동행이 아닌 납치라는 걸 또렷하게 인식하게 됐고, 납치되었다 되돌아오는 데 성공하는 빈도가 늘고 있다.

여러 생각이 비슷한 영향력(가치, 우선순위)으로 머릿 속에서 날뛰고 시시각각 생기는데, 이 부분에도 변화가 있다. 양자요동 치듯 머릿 속에서 날뛰는 생각들이 다소 줄었다. 개체(생각) 수와 날뛰는 강도가 줄었으며, 무엇보다도 각 생각이 뿜어대는 영향력 차이를 가늠하는 게 점점 더 수월해진다. 온갖 생각이 시시각각 생기고 움직이는 현상(증상?)이 없어지진 않지만, 가장 영향력을 내는 생각을 찾아내고 그 놈을 놓치지 않은 채 따라가는 게 수월해져서 덜 혼란스럽다. 아니, 이전엔 누구나 다 그렇다고 마땅하게 여겨서 그런 상태를 혼란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상태를 혼란이나 혼돈이라고 느낀다면, 나 역시 그 느낌을 이젠 좀 알게 된 것 같다.

ADHD가 아닌 사람은 평소에 머릿 속에 떠있는 생각 개수가 적거나, 많더라도 순번이나 영향력 같은 것이 있어서 정렬을 하며 사는 건가?

42Seoul

42Seoul에 비상근 멘토로 참여해 여러 교육생분들을 멘토링했다. 탐나는 분을 여럿 만났다. 현업에서 뛰는 비상근 멘토가 멘토링하는 과정에서 교육생들 데려가도록 만드는 것이 비상근 멘토 제도의 목적 중 하나로 있는 게 분명하다.

멘토링하다보니 단골처럼 몇 가지 주제가 반복되는 걸 알게 됐다. 2022년엔 블로그에 이 주제에 관해 글쓸 예정이다. 멘토링하며 나눈 이야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멘토링 단골주제 자체를 소재로 삼는 것이다.

좋은 경험을 주는 멘토링은 뭔가 가르쳐주거나 도와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채 멘토링하는 경우 보다는 멘티가 얘기 나누고 싶은 게 많아서 그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그리고 멘토링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멘티와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멘토와 멘티 간 맥락이 유지되고 올라간 상태에서 진행한 멘토링이 좋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 멘티는 이력서에 대해 두 번 멘토링을 했는데, 멘토링 과정에서 변화하는 각 버전 별 차이가 잘 구분이 되었다. 그 차이가 간접적인 피드백인 셈이다. 그래서 멘토링이나 코칭에 대한 여러 고민 주제 중 자연스럽게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여 멘토링하는 내 만족도를 높이는 부분도 고민하고 있다.

3분기에 한 달 정도 쉬면서 방향성 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읽었다. 상당히 효율 떨어지게 읽었다. 이해하고 배우며 읽는 게 아니라 다 읽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읽은 책을 다시 읽기도 했는데, 읽었다는 사실과 내용을 까먹어서 처음 보는 것 마냥 읽다가 예전에 책에 남긴 메모를 발견하는 식이다. 올해에 40권 정도 읽었는데, 3분기에 32권을 읽었다. 32권 중 20권은 400쪽이 넘는데, 대체로 기술서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도 이럴지니, 어쩌면 비지도학습으로 자연어 학습을 훈련하는 기계보다도 더 언어 활동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충 읽었지만, 그래도 몇 권 꼽아본다.

  • 좋았던 책 : High output management
  • 리더십, 코칭 : 유능한 관리자, 개발 7년차 매니저 1일차, 두려움 없는 조직, 코칭 리더십(존 휘트모어)
  • 현실 도피를 도와준 책 : 죽음의 수용소에서, 블랙홀과 시간여행, 수학이 필요한 순간, 물리의 정석
  • 재밌게 본 책 :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 기대 안 했는데 좋았던 책 :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
  • 먹고 사는 데 도움을 준 책 : JavaScript로 함수형 프로그래밍 학습하는 책들, 전문가를 위한 파이썬, 프로덕트 리더십, 테스트 주도 개발로 배우는 객체 지향 설계와 실천, 돈의 심리학

아참, 3분기에 책을 읽으며 두 번 산 책 몇 권을 발견하는 성과도 있다.

제텔카스텐

얼마 전부터 메모하는 방법과 체계를 제텔카스텐(zettelkasten)에 맞춰가고 있다.

제텔카스텐을 단순하게 소개하자면, 임시 메모를 기록하고, 그 메모를 자신의 언어로 즉 자신의 생각으로써 문헌 노트나 영구 노트로 정리한다. 문헌 노트나 영구 노트로 정리하고 나면 임시 노트는 제거한다. 문헌 노트와 영구 노트는 서로 연결하여 상향식으로 아이디어 군집(cluster)을 형성하는데, 연결하는 과정도 문헌 노트와 영구 노트를 작성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아이디어)이 기준이다. 제텔카스텐에 대한 메모이더라도 ADHD에 관한 내 생각이 메모와 노트를 작성한 이유라면, 그 메모엔 ADHD 관련 키워드를 달고 그 키워드와 관련된 기존 메모와 연결한다.

지인 소개로 제텔카스텐을 처음 접할 땐 별 감흥이 일진 않았는데, ADHD를 치료하는 최근에 비로소 관심이 생겨서 시도하고 있다. 한 달 정도 됐는데, 아직 성과는 없다. 이쯤되면 대개는 내게 안 맞다고 여기고 포기하는데, 내 취향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난 임시 메모를 남발하고 있으므로 제텔카스텐을 제대로 실천하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들다보니 자꾸 미루고 있는데, 며칠 전부터 임시 메모 몇 개를 문헌 노트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 구절은 기억 안 나는데다 문헌 노트로 정리한 임시 노트는 삭제하다보니 책을 읽으며 남긴 메모인데도 책에 대한 내용은 안 남고 책에 대한 내 생각이 남았다.

글을 읽다보면 글을 쓴 글쓴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머릿 속에서 모델링이 이뤄진다. 아무 글이나 그렇진 않고 내 취향이나 성향에 맞으며 글쓴이의 생각이 드러나고 잘 쓴 글이어야 한다. 난 몇 달에 한 번씩 내 옛날 글 몇 개를 다시 읽는데, 내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 그러니까 나에게서 독립/분리된 인격체로서 저 글을 쓴 글쓴이에 대한 모델링이 가끔 이뤄진다. 못쓴 글이지만 내가 쓴 글이니 가끔 그런 경험을 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다. 과거에 쓴 내 글로 인물을 모델링하는데, 그 인물이 나 혹은 나와 매우 비슷한 부류라고 느껴지는 인물이기에 사진이나 동영상 보다도 더 입체감 있게 과거 속 나를 보는 내 취향을 제텔카스텐 방법으로 남기고 꺼내보는 것이다.

이 회고는 초고를 작성하는 데 40분, 퇴고하는 데 90분 걸렸다. 이 정도 시간을 들여서 쓴 글이 이 수준이라 마음이 아프다.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제텔카스텐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 계획

집필하고 있다. 2022년이면 8년차가 된다. 계약 당시 1.6 버전이던 Django는 2022년 중에 4.0 버전대로 접어든다. 음… 계약한 출판사에서는 왜 기다려주는 거지. ㅜㅜ 2022년엔 반드시 초고를 완료하겠다.

몇 가지 주제로 블로그 글 혹은 적절한 매체나 방법으로 컨텐츠를 만들려 한다. 색다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팀을 만들고 있고, 내년엔 더 적극 집중과 관심을 투자할 계획이다.

퇴고하며 거의 분량 반 정도를 쳐냈는데도 여전히 참 말 많다. 내가 말 많다는 걸, 심지어 갈수록 많아지는 걸 느낀다. 말 줄이는 노력도 계획에 넣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