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 나들이

지난 일요일에 서울숲로 여자 친구와 나들이를 갔다. 만날 방구석에서 놀거나 기껏해야 고기 사먹으러 나가는 것이었는데, 날도 따뜻하고 봄 벗꽃을 못본 터라 큰 마음 먹고(?) 나들이를 나선 것이다.

처음엔 여의도 하늘 공원에 가려 했는데 공원에 올라가는 긴 계단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 사진을 어떤 블로그에서 보고 마음을 접었다. 중고교 시절 내내 서울 송파구 올림픽 공원만 다닌 탓에 막상 나들이 할 곳으로 여의도 하늘 공원을 제하자 딱히 갈 만한 공원이 내 머리 속엔 없었다. 올림픽 공원을 갈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여자 친구가 가보지 않은 곳에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나들이 추천 공원”으로 검색을 했는데 검색 결과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검색 결과를 편집하면서 나들이 다니기 좋은 때에 나들이 갈 만한 곳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게 아쉬웠다. 신경 좀 쓰지.

가는 길은 쉬웠다. 2호선 한양대에서 내려서 녹색 버스를 타면 5분 안에 도착한다. 정류장 수로는 두~세 정거장이다.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도 되고 세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도 되는데, 세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는 게 낫다.

처음엔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과 떡볶이, 그리고 마실거리를 사들고 가서 먹으려 했다. 근데 서울숲 근처엔 분식집이 없었다. 그 흔한 김밥** 이름을 가진 분식집도 없었다. 성동구에서 운영하는 어떤 건물에 달린 매점 바깥창에 김밥이라는 낱말이 써붙어 있길래 사려 했지만 700원짜리 삼각 김밥만 판다.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냉면을 사먹고 갔다.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이 사진을 보면 괜히 위 아래를 뒤집어 보고 싶다.

들어가자 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었다. 땅바닥에서 위로 솟는 분수였고, 치솟는 가느다란 물기둥 사이를 뛰어 다니거나 물과 맞서는 아이들, 흔한 표현으로 초딩들이었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평화의 문 부근에도 저런 광경을 여름에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마 저 광경은 세계 공통이 아닐까 싶다. 나들이를 빌미로 엄마의 만류에도 마음껏 옷이 젖도록 뛰노는 아이들과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함께 분수로 뛰어드는 중장년에 덩치 큰 큰 아들들이 어우러져 땅바닥 분수대를 기획했을 기획자를 기쁘게 하는 광경이 계속 되었다.

강물 연출 사진
강물 연출 사진

난 큰 공원보다는 근린 공원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나들이를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이나 우체국처럼 일상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 잡고 사람들에게 일상 속 쉼을 제공하기 때문에 뜨거운 햇살을 피하거나 앉아서 쉴 곳이 곳곳에 잘 마련 되어 있다. 다른 동네는 모르겠지만, 내가 15년 넘게 지낸 송파구엔 크고 작은 근린 공원이나 그 비슷한 곳들이 여럿 있는데(백제 고분 등) 느릿하고 길게 시간을 잡아끌며 쉬기에 참 좋다.

서울숲은 성동구나 광진구에 있는 공원 중 아마 가장 클 것이다. 사람 꽤 많이 사는 두 지역이라 그런가 공원엔 사람이 많았고 30도에 이르는 초여름 더위를 피해 쉴 만한 곳엔 이미 사람들이 토박이들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돗자리를 챙기지 않은 실수가 아니더라도 햇살을 피할 곳이 마땅찮았다.

그래서 우린 거의 쉬지 않고 이곳 저곳 거닐었다. 자기 소유로 디지털 사진기를 가진 적이 없는(아마도) 여자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사진기 사줬는데, 아직 사진기 조작이 익숙치 않아 사진 찍는 연습을 할 겸 사진 구도 좀 나오는 곳을 찾듯 이리 저리 거닐었다.


개똥아... 사진기 거꾸로 잡았다. 사진기 잡는 법부터 배우자.
(실은 사진기 앞 은빛 쇠붙이를 거울 삼아 눈 비추어 보는 중)

사람도 많아 사진 구도 잡기도 안좋고, 하늘엔 구름이 껴 햇빛 놀이하기도 좋은 날은 아니었다. 또 똑딱이 사진기 한계인지 아니면 캐논 익서스 제품 한계인지 ISO를 올리면 여지없이 사진에 잡티가 심하게 들어갔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많이 건지진 못했다. 그럴 땐 시점을 바꾸어 원하는 장면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숲엔 이런 오솔길이 없다. 접사와 땅에 사진기를 대고 찍어서 연출한 장면이다. 커다란 D-SLR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위압감 들게 사진기를 머리 높이까지 들어 찍을 대상을 바로 바라보거나 내려다 보며 찍기 일쑤지만, 작고 가벼운 똑딱이로는 이렇게 사진기를 땅바닥에 바싹 대거나 벽에 껌처럼 붙어 사진을 찍어도 불편함이 없다. 아, 물론 여자 치마 속을 찍으려는 의도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난 다른 사람 눈길 별로 의식 안하는 뻔뻔함을 가진 탓에 “거기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풍경 사진을 찍어와 사람들을 갸우뚱하게 만들곤 한다. 게 중에는 잘 찍었다는 칭찬을 받는 사진도 제법 있다. 풍경이나 물체 사진을 찍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덴 역시 칭찬이 주효하다.

그런데 인물 사진을 찍는 솜씨는 안쓰러움이 절로 들 정도이다. 신은 내게 풍경이나 물체 찍는 솜씨를 준 대신 사람 찍는 솜씨를 가져갔나 보다. 사진으로 한 인물 한다는 사람들도 내 솜씨 앞에서는 여지 없이 망가지기 일쑤이다. 내 머리 속에, 눈 앞에 그려진 장면과 모습에 사진을 찍으면 신기할 정도로 웃기거나 민망한 모습이 사진기에 담겨 있다.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여서


앗싸, 호랑나비~!

춤을 추게 만들기도 한다. 맹세코 난 저런 모습을 찍고 싶어서 찍은 것이 아니다. 혹시 사람은 움직여서 잘 못찍나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표정과 자세를 잡아주는 사람도 나에겐 희생 당할 뿐이다.

차라리 얼굴이 나오지 않게 아예 머리 꼭대기나

옆모습을 찍는 것이 낫다. 그래서 나한텐 사람 사진이 별로 없을 뿐더러 있더라도 얼굴 나온 사진은 별로 없다.

세 시간 정도 거닐다 보니 우린 지쳤다. 앉아 쉴 곳이 마땅찮기도 했지만 신발과 바지가 뿌옇게 될 정도로 흙먼지가 날려 더 지쳤다. 역시 큰 공원은 거닐기 보다는 나무 그늘 아래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 쉬는 게 상책이다. 그나마 난 운동화를 신었지만 여자 친구는 발바닥 충격 흡수를 거의 해주지 못하는 구두를 신어서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모처럼 만나 팔짱 끼고 나들이 하는 사실에 힘든 내색 없이 즐거이 나들이를 즐겨 주었다.

요즘 난 아주 가난하다. 일이 며칠 분량 밀려서 야근을 해야 하는데 야근할 때 밥 사먹을 돈이 없어 야근을 하지 않고 칼퇴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돈 많이 안들면서 우리가 함께 하지 않은 추억을 만들려다 보니 다소 몸이 고되게 나들이를 즐긴 점도 없잖아 있다.

밤 아홉 시 차를 타고 다시 강릉으로 향하는 여자 친구는 내가 가난하고 여자 배려심이 부족한 탓에 꽤 피곤해 보였다. 미안했다. 얼른 내 주머니 경제가 지금보다 더 정상화 되었으면 좋겠다. 여자 친구 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나이고 싶다.

그런 바람을 생각하며, 그리고 그 바람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을 시원한 사진에 담아 나들이 추억을 작은 서랍에 담아 머리 속 서랍장에 넣어 본다.

덧쓰기 : 이 글의 낱장주소를 보면 맨 끝에 forest 오타로 fores 라고 친 것 같지만, 이는 사실 워드프레스가 길이를 자른 것이다. -_-


진한 커피향을 품는 예쁜 레뷰 머그

지난 해 12월에 창업을 하고 살림을 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냉장고는 크기 상관없이 그 속이 미로 같아서 도무지 반찬을 찾을 수가 없고, 살림살이는 어디서 사야 하는 지 몰라 헤매기 일쑤다. 빨래라도 하고 다니는 꼴이 장할 지경이다.

왠지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게 있다. 난 비록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라이터를 돈 주고 사는 걸 아까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잔이나 찻잔도 마찬가지이다. 여자 친구가 예쁜 잔을 보며 입이 헤벌어져 정신 못차리는 마음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한다. 물을 담으면 그만인 도구가 비싸려면 한없이 비싸질 수 있는 개념 없는 값 정책도 못마땅하다.

온누리에 있는 무엇이든 들여다보고 남기는(review) 누리집인 레뷰에서 행사에 참여하면 예쁜 머그(머그잔)를 준다고 했을 때 “다 비켜! 이 떡밥, 아니 이 머그는 내꺼야!”라고 외치며 허억댔다.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잔을 공짜로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했다. 행사에 참여하는 순수한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이 순전히 공짜로 잔을 얻는 얄팍한 마음에 혀를 낼름거리며 머그를 주는 행사들 중 두 개에 참여했다. 레뷰측에서는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당첨시켜주어 날 기쁘게 해주었다.

처음 받은 잔은 흰색 잔이었다. 정말 무척 예뻤다. 다소 단순한 모양새인데 그 단순함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마치 아가들 손짓 발짓에는 귀여운 척 하려는 어떠한 꾸밈도 없는, 심지어 투박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단순하고 빠른 곧은 선 움직임에서 오금이 짜릿한 귀여움을 느끼듯이, 레뷰 머그는 그러했다.

그 다음 받은 잔은 검은색 잔이었다. 얼씨구. 흰색은 아름다움이라면 검은색은 귀여움이었다. 같은 크기에 모양새인데 단지 빛깔만으로 개성이 서로 다른 잔이 되었다. 개성은 확연히 달라도 실은 한 형제라는 걸 나타내듯 빨간색,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마냥 빨간색, RGB 색으로 표현하면 (255, 0, 0)이라고 할 수 있을법한 빨간색으로 나란히 출신지가 적혀 있는데, 새빨간색은 새하얀색과 새까만색과 그리도 잘 어울렸다.

“이 잔은 커피를 마실 때 쓰자!”

나와 여자 친구는 의견 차이 없이 바로 쓰임새를 결정했다. 이건 참 대단한 상황이다. 난 살림에 자신이 없어 여자 친구의 곰손이 휙 휙 움직여 살림살이를 다룰 때 내 의견을 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레뷰 머그에 대해선 지지 않으려는 듯이 잔 쓰임새를 또렷히 말했고 여자 친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수가 고수와 꼭 같은 의견을 동시에 내놓아서 하수가 기쁨을 누린다면 분명 이런 느낌일 것이다.

나와 여자 친구는 커피를 에스프레소나 그에 가깝게 진하고 걸죽하게 내려 마신다. 양이 적다보니 커피는 빨리 식는다. 그리고 100cc 남짓한 커피를 담을 아담한 잔도 마땅찮다.

그런 점에서 레뷰 머그는 과연 훌륭했다. 잔 살집이 두꺼운 편이라서 뜨거움을 오래 품어 주었고 100cc 정도 되는 커피가 반에서 2/3 정도 차올라서 보기에도 아주 적당했다. 뜨거운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받아내면 그 뜨거움이 은은하게 잔 전체에 물결친다. 입을 대고 후우- 불면 콧등 부근부터 김이 안경 렌즈에 차올라 그 향을 입과 코와 눈, 귀로 전해준다.

“아, 그래, 이 향은 분명 케냐 AA구나”
홀짝 홀짝 커피를 다 마시더라도 레뷰 머그는 잠시 미련을 두듯 커피향을 품는다. 머그가 열을 오래 잡아두는 특징이 있다곤 하지만, 레뷰잔으로 진한 커피를 마시면 그 열을 붙잡아두기 보다는 온 몸으로 품는 기분이다. 같은 커피라도 딱 어울리는 잔에 마시면 머리 전체를 울리며 느끼는 맛이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예쁘고 푸근한 머그를 진작 받아 겨우내 알차게 썼다. 지금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는 커피를 담고 있는 레뷰 머그가 하얀 노트북 옆에 놓여 커피의 따스함을 품고 있다. 이제 봄날이어서 이 녀석이 아니더라도 몸을 노곤하게 하는 따스함을 만날 수 있어 겨울에 즐기던 커피향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부른 날에 창을 활짝 열어 볕을 받아들이고 Radiohead의 No surprises를 들으며 레뷰 머그에 담긴 커피와 머그가 품은 향을 느끼는 새로운 즐거움이 겨울 정도이다.

더 늦지 않게 레뷰 머그 글을 쓰는 이유. 그것은 작은 머그 두 개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실용주의 세상에 떠밀려 잊혀지는 느긋함과 정신 만찬에 대한 작은 답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