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 말해 기획병.

내겐 기획병이 있다고 가끔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냥 간단히 하면 될 것을 너무 생각하며 이리 저리 기획하다가 로 만드는 것이다. 기획이 밥벌이이다보니 관점이나 사고 방식을 넘어서 습관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내겐 필요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겐 필요할 수 있는 물건은 중고로 아주 싸게 팔거나 공짜로 주기로 마음을 먹고 이런 저런 모임이나 동호회를 알아본다. 그러다 이런 생각은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특정 단체나 기업을 끌어들여 함께 할 수 있는 발상도 떠올린다. 30분 후. 내 머리 속에는 재단 하나가 설립되어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6월 말에 광주에 놀러가 낚시나 좀 하고, 부산에 가서 꽤 오래 알고 지낸 을 만나 회나 먹을까 생각을 했다. 아주 짧은 호흡으로 이 문장을 줄이면 “놀러 간다” 고 할 수 있다. 신변에 변화가 생길테고, 변화 중 쉼을 가지려는 것인데...

어느 덧 나는 “이야기 여행”을 기획하고 있었다. 주요 동네(대전, 광주, 전주, 부산 등등)를 지나며 그 동네에 사시는 분들을 만나고, 그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기록하는 것이다. 찾아가는 소규모 Barcamp 같은 거랄까? 머리 속에는 금세 기획서를 거의 마무리 했고 암산이 필요한 비용 기획만 남았다.

아차. 나는 30분 동안 꿈동산에 있다 허겁지겁 현실로 돌아와 기획들을 싹 발라냈다. 이렇게 금방 몽상을 접으면 다행이지만, 며칠, 심할 경우 몇 년 동안 꿈을 꾸며 끙끙대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거 빨리 현실화 해야 할텐데 할텐데, 하면서 말이다. 혹, 나보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사람이 현실화해서 내놓으면 며칠 속 쓰려서 발버둥치기도 하고, 끝끝내 현실화 안되기도 하고, 현실화 됐는데 처참하게 실패하는 걸 보며 몽상으로 그쳐서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요즘이야 몸과 마음, 그리고 주머니가 가난해서 몽상으로 끝내지만, 예전엔 몸과 마음은 가난하지 않아서 일을 벌인 적이 있고 그래서 주머니를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좋게 말해서 기획병이지, 옆에 피해를 주는 이 정도 증상은 몽상도 아니고 몽유병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몽유병.

몸과 마음이 주머니에 들어가버린 지금은 주머니만 단속하면 몽유병으로 밖에 나가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냥 홀로 작은 방에 갇혀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히고 그만이다. 성공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나 자신도 주도하여 다스리고 몽상으로 그치지 않게 하겠지만, 아직 나한테 그런 흠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참고 억눌렀다. 도저히 못참겠다 싶으면 작은 일부터 하나씩 벌였다.

이젠 힘들다. 더 이상 못참겠다.
싶을 때가 있다. 벌써 4년 됐다. 4년 동안 쌓인 꿈은 많고, 몸과 마음은 주머니에서 좀 더 풀려나 머리를 비죽 내밀고 있다. 몽유병으로 방 곳곳을 부딪혔더니 온 몸이 다 아파 몸살이 날 지경이다. 이젠 움직여야겠다.

그전에...
6월 말에 광주와 부산 가는 걸 “놀러 가는 것”으로 깔끔하게 다짐부터 하고.


2007년 동원 예비군 훈련 (미지정)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미지정으로 동원 예비군 훈련을 받았다. 미지정은 출퇴근을 하는 방식이다. 집에서 훈련장까지 약 34km이기 때문에 한참을 달려야 한다. 거리가 얼마가 되건 훈련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선택권은 없기에 나는 투덜대며 사흘 동안 중부 고속도로를 3번 왕복했다.

첫 날은 무난했다. 변함없는 맛으로 많은 아저씨들을 불편하게 하는 급식 도시락, 10분 교육을 위해 30분 동안 줄 서고 이동하고, 10분 동안 담배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효율성 꽝인 교육 체계. 피곤하긴 했지만, 큰탈 없이 보냈다.

둘째 날에 문제는 시작됐다. 예비군 급식 도시락 위생과 맛 등으로 불만이 많다며 기존 급식 도시락에서 즉석 발열 도시락(전투 식량)으로 바꾼다고 했다. 줄을 당기면 열이 생기며 햇반처럼 설 익은, 혹은 위생 포장한 반찬을 데우는 도시락이다. 육군 중 그 첫 실험을 우리에게 한다고 했다. 맛에 자극이 강하고 설 익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20분 동안 기다리는 지루함이 있긴 했지만, 그냥 저냥 먹을만 했다. 신기하기도 했고. 다만, 그날 먼지를 많이 마셨는 지 퇴근할 때 감기 기운을 느꼈고, 밤새 끙끙 앓았다.

셋째 날은 사흘 동안 있었던 훈련 중 최악이었다. 감기 몸살로 눈 앞은 돌고 열 때문에 온 몸은 아프고, 아침 첫 훈련을 20분 동안 산 꼭대기에 올라가 5분 교육을 받은 뒤 다시 내려오는 뻘짓에 화가 치밀었다. 점심은 가관이었다. 오늘 점심도 어제처럼 즉석 발열식 도시락이었는데 오늘은 다른 업체에서 만든 것이었다. 밥은 햇반, 카레는 3분 카레이고 용기 안에 발열체가 있었다. 근데 발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밥은 익지 않았고 카레 역시 미지근했다. 전혀 안익은 햇반에 전혀 안익은 3분 카레를 부어서 먹는 딱 그 맛이었다. 제대로 제품 실험을 하지 않고 급히 공개 입찰에 참가한 티가 역력했다. 맛이야 그렇다쳐도 이렇게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제품을 내일이면 퇴소해서 자신의 일자리로 복귀할 사람들에게 실험하는 윗선에 화가 났다. 부실한 도시락을 먹고 이 산 저 산 타고 다니며 아주 뜻 없이 시간을 보내며 예비군 마지막 날을 마쳤다.

예비군 제도는 불합리하고 효율성도 떨어진다는 등 문제 제기야 나 말고도 많이 했으니 굳이 내가 또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아주 짜증스러운 동원 예비군을 보냈다는 투덜거림을 하고 싶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