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블로그는 확실히 다르다.

미리 밝힐 필요 없이 이 글에서 밝혀지겠지만, 커다란 글씨 크기와 다닥 다닥 길게 이어쓰여진 문장으로 구성된 덕에 이 글이 장문으로 보여 장문의 압박을 감당하지 못하고 글 대충 읽고서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라며 뻘쭘한 이모티콘을 덧글로 날리는 이들을 위해 미리 밝혀둔다. 무엇을? 싸이월드는 블로그와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주장이라는 것을. 물론 개인적 취향을 말하자면 난 싸이월드를 싫어한다. 싸이월드가 블로그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폐쇄적이라서 싫어한다. 난 폐쇄적인 정책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정책이 옳지 않거나 못된 정책이라서가 아니라 내 취향상 싫어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태터툴즈의 개발 관리 정책의 폐쇄성을 싫어하는 것과 같다. 원 개발자인 JH님은 소스 관리의 용이성과 무단 배포에 따른 태터툴즈의 악용을 막는 관점에서 그런 폐쇄적 정책은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난 그 정책을 싫어한다. 그 정책이 틀려서가 아니라 단지 내 취향이 공개(open)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는 얼마나 다르냐고? 싸이월드와 블로그는 얼마나 다르다. 싸이월드의 태생은 폐쇄성에 있다. 싸이월드닷컴은 폐쇄적 개인의 공간(미디어라고 하긴 뭐하고)이 컨셉이고 기획 의도로 보인다. 왜 그렇게 보이냐면 똥 마려운 사람이 독한 방귀 냄새를 풍김으로서 그의 배변 시기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듯이, 싸이월드 자체가 그런 의도를 풀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싸이월드는 폐쇄적 개인 미디어(미디어라고 하긴 뭐하지만 몇 보 양보했다. 난 매너 시민이다)이다.

블로그의 태생은 개방성에 있다. 체제/체계(System)이나 위치(Space)의 제한을 받지 않고 누구나 나를 위한 편리함으로 타인의 배설(그것이 거름일수도 있고 그냥 똥일수도 있고)에 내 똥도 덧씌워보고 냄새를 맡는 것이 블로그라는 문화이다. 그런 개방형 개인 미디어를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기술이 트랙백(먼 엮인 글)이고 RSS 이다. 트랙백과 RSS는 블로그라는 개방성을 구현하는 기술일 뿐이지 블로그의 정체성은 아니다. 만일 저 기술이 블로그라는 녀석의 정체성이라면 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침팬지도 인류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침팬지는 침팬지 DNA 를 가진 동물이고 인류는 인류 DNA 를 가진 동물이다. 손을 사용하는 것이 이 동물들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싸이월드 블로그
공통점 개인 미디어
차이점 폐쇄형 개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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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많아서 내용이 눈에 안들어올 사람들을 위해 친절을 베풀어본다. 위의 표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싸이월드와 블로그의 공통점은 있다. 차이점도 있다. 차이점 하나 때문에 이들이 완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는 우는 없을 수도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단지 차이점 하나 때문이 아니고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것이 싸이월드와 블로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다르다

다르다[다르니·달라][형용사][르 불규칙 활용]
1.같지 않다.
¶의견이 서로 다르다./모양은 달라도 값은 같다. ↔같다.
2.(생각이나 언행 따위가)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다.
¶역시 전문가라 보는 눈이 다르다./이 회사에서 펴낸 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틀리다</p>

틀리다 ... Ⅰ[자동사][타동사] ... 1.(계산이나 일 따위가) 어긋나거나 맞지 않다. ... ¶결산이 틀리다./놀러 가기는 다 틀렸다. ... 2.사이가 벌어지다. ... ¶사소한 일로 친구와 틀리게 되다. ... 3.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나빠지다. ...

※ 출처 : 네이버 사전 ※

다르다와 틀리다의 사전적 의미이다. 나의 이런 사전 의미를 갈무리해서 글에 붙이는 행위는 대단히 유치하다. 블로그와 싸이월드는 다를까 틀릴까.

블로그와 싸이월드는 틀리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지적 허영이라는 표현만큼 웃기는 이들이다. 그 사람들은 블로그와 싸이월드가 틀리다며 싸이월드를 블로그의 관점에서 판단을, 블로그를 싸이월드의 관점에서 판단을 하는 우를 범한다. 키보드를 마우스의 관점에서 이건 옳고 이건 열등하다며, 마우스를 키보드 관점에서 이건 옳고 이건 열등하다며 틀림을 논하는 웃기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키보드와 마우스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 중 일부는 근거없는 상대 서비스에 대해 자신이 이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쭐함을 갖고 있다. 그런 이들이 아직도 있냐며 지적 허영 떨지 말라는 케이제이님의 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걔네들 보기 싫으니까.

또 쓴다. 이현도의 "사랑해"를, 모노크롬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를 노래방에서 15,000원어치 부르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쓴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는 다르다. 만일 싸이월드가 자신의 정체성인 폐쇄성을 버리고 블로그처럼 개방성을 갖추면 그것은 개방형 개인 미디어로서 감히 블로그라고 칭해도 괜찮다. 아니, 블로그 문화를 갖고 있는 개인 미디어 형태의 커뮤니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태터툴즈가 블로그의 개방성을 버리고 태터센터내에서 끼리 끼리 폐쇄적으로 놀게 만들면 그것은 폐쇄형 개인 미디어로서 블로그라 부르면 이 글에서 싸이월드라는 단어를 태터툴즈로 바꿀 것이다. 게시판에 트랙백과 RSS 기능 달았다고 그것이 블로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로그 문화를 담고 있어야 블로그라 할 수 있다. 블로그 문화? 예전에 상당히 공격적으로 글을 써내려간 블로그가 과연 개인 미디어일까?에서 이야기 했으니까 여기서는 쓰지 않겠다. 이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고로.

싸이월드라는 녀석을 운영하고 있는 당사자인 SK Communications 에서는 싸이월드가 블로그냐는 물음에 어찌 생각할까? 직접 물어볼 필요 없이 그들은 싸이월드와 블로그가 다르다고 인정하고 있다. 각종 언론 매체에 블로그가 요즘 유행이며 블로그 서비스에서 가장 인기 좋은 싸이월드에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꼬셔내는데 성공했다며 분홍빛 바탕의 기사, 아니 홍보성 기사를 SK Communications 에서 자꾸 뿌리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로 싸이월드가 블로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최근에 "블로그"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부각되니까 슬쩍 무임 승차하려는 마케팅과 홍보적인 차원의 언론 플레이인 것이다. 그 효과가 꽤 좋아서 최근 싸이월드의 Page View 는 급격히 늘어났고, 지금도 심심찮게 이른 아침에 지하철 역 입출구에서 배포하는 무가지 신문에서 "싸이월드라는 블로그에는 연예인도 활동하고 이쁜 여자들도 많다"고 홍보 담당자가 작성한 기사가 기자의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SK Communications(타이핑이 귀찮은 관계로 이하 nate.com으로 표기)에서 운영하는 네이트닷컴에는 싸이월드와 블로그가 각각 존재한다. 그네들의 홍보와는 다른 모습이다. 서비스의 구분을 보더라도 블로그는 커뮤니티에 속하고 싸이월드는 싸이월드라는 독자적인 분류에 속한다. 즉 이들을 구분하는 것이다. 만일 정말 nate.com 에서 정말 싸이월드는 블로그라고 생각(착각)했다면 싸이월드에 블로그의 정책들과 시스템들을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nate.com은 싸이월드는 싸이월드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유지하며 발전시켜가고 있고, 블로그는 블로그대로 개발하여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따르고 있다(얘도 네이버 블로그처럼 꽤 폐쇄적이지만).

그런 nate.com 의 정책은 대단히 옳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폐쇄형 개인 미디어인 싸이월드의 정체성을 개방형 개인 미디어인 블로그에 기준을 두고 개조(분명히 해두자. 개"선"이 아니라 개"조"이다)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nate.com 의 서비스 기획자가 꼴통이라서 싸이월드와 블로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도 안해보고 이것 저것 막 줏어먹고(인수) 만들라고 시켜서(외주) www.nate.com 이라는 사이트에 붙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쓴 책을 보면 그는 그런 꼴통이 아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책은 그의 똑똑함과는 달리 별로다. 남 좋으라고 책 광고 안하려 어떤 책인지 이곳에 쓰지 않았지만 어떤 책인지 정 궁금한 사람은 email 보내시라. email@한날.com 이다)

블로그와 싸이월드는 다르다. 수차례 반복되는 말이라 눈 감고도 저 문장을 타이핑 할 정도다. 아마 이 글을 보는 당신도 저 문장을 눈 감고도 칠 수 있을 것이다. (키보드 자판 배열 못외운 사람이 아니라면. 흐흐. 난 말장난을 사랑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고 틀림의 관점으로 접근하여 마치 무단으로 스크랩(펌, 갈무리)하여 출처를 알 수 없는 인기있는 글마냥 근거 없고 출처 불분명한 우쭐함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대단히 웃기는 어처구니들이다. 그들의 공간(블로그건 싸이월드건)에는 어처구니가 가출한 어처구니들이 모여 산다. 하지만 틀림을 질타하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사람도 별 다를 바 없다. 지적 허영이 아닌 논리의 허영이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로 허영을 부려도 애초 틀린 접근법(블로그를 단지 트래백과 RSS 라는 기술로 접근하는 논리)이고 뻔한 사실과 답을 외면하는 접근법(폐쇄형 개인 미디어와 개방형 개인 미디어로서 둘이 다름에도 단지 "개인 미디어"이기에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논리)이다.

정리한다. 블로그와 싸이월드는 분명히 확실히 명확히 뚜렷히 다르다. 난 싸이월드가 블로그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싸이월드는 싸이월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해가고, 블로그는 블로그의 정책을 유지하며 발전해가길 원한다. 개인 미디어로서 서로 다른 정책(폐쇄, 개방)을 보고 판단하여 이용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쓰면 된다. 그리고 이용자들이 개인 미디어 유형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환영받을 일이다. 개인 미디어하면 그놈이 이놈 같고 이놈이 그놈 같은 흐름은 슬픈 일이다. 블로그가 싸이월드보다 잘난 거 없고 싸이월드가 블로그보다 잘난 거 없다. 단지 다를 뿐이다. 그와 더불어 블로그의 정체성을 블로그라는 문화가 아닌 트래백과 RSS로 한정하고 블로그건 싸이월드건 그놈이 그놈이라는 이상한 결론도 명확하게 내리지 말자. 폐쇄라는 단어와 개방이라는 단어가 이음동의어로 국어 사전에 등록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말이다.

...... . . .
덧붙임 1 : 물론 이 글은 내 주장일 뿐이지 불변의 진실은 아니다. 내 관점에서의 진실이라는 얘기이며, 이에 대한 이견은 당연히 존중한다.

덧붙임 2 : 글이 케이제이님을 겨냥하여 공격하는 의도로 보인다. 맞다. 공격한 거다. 그의 "지적 허영"이라는 표현에 찔려서 발끈한거니까. 하하하하! 난 만우절이 아닌 날에도 농담성 거짓말을 즐긴다. 그러니 이 덧붙임을 믿으면 바보다. 어쨌건 글투에 기분이 상하질 않길 바래보며 혹 기분이 상했다면 알아서 양해해주길 바란다. 케이제이님의 글도 충분히 공격적임에도 난 알아서 양해했으니까.

덧붙임 3 : 그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에는 어느 글에건 트랙백을 보낼 수 있다. 내 홈페이지(블로그 포함한 홈페이지 자체. 지금은 블로그 뿐이지만)의 구현 계획인데 그의 홈페이지에서도 구현되어 있었다. 난 그런 개방성을 좋아한다. 그게 블로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런 개방성이 좋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홈페이지를 링크한 것은 개방성과는 무관하다. 좋은 글이 많기에 등록한 것이다.


나의 죽음 경험기

난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손은 열심히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손가락은 제 짝을 누가 채가기라도 하는냥 쫓기듯 적절한 키를 찾아내어 분주히 움직였다. 간혹 한쪽 손은 키보드에서 벗어나 둔탁하게 생긴 마우스로 향했고 검지 손가락은 회색의 마우스 휠을 이리 저리 굴리기도 했다.

난 코를 막고 있었다. 탁하고 묵직한 공기를 거부하듯 코는 공기를 흡입하지 하지 않고 키보드 위에서 난무를 추듯 움직이는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뭔가 심장을 깊이 찌르며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무언가 침투하여 심장의 헐떡임을 방해하였다. 심장 속에서 마악 정화된 피는 역류하는 듯 싶더니 곧 심장을 침입해온 낯선 감촉의 물질을 휘감듯 뿜어져 나갔다. 무얼까. 나는 판단을 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러나 나의 두뇌가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 판단하기도 전에 눈 앞이 캄캄해지고 사고가 멈추고 있었다. 두뇌에 혈액 공급이 멈춘 것이다. 인체 속으로 접수되는 에너지의 25%를 홀로 소비하는 두뇌는 에너지를 싣고 오는 혈액이 갑작스레 줄어들고 마침내는 공급이 멈추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하던 일을 멈추었다.

나는 두뇌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일까, 아니면 나라는 객체를 표현하는 정체성을 저장하고 있는 DNA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답을 못내렸기에 그것이 나의 두뇌이건 혹은 DNA이건 일단은 "나"라고 해두자. 육체의 모든 움직임은 멈추었지만 "나"는 미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생각, 사고, 판단. 그것은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느낌은 대단히 따뜻했다. 아니 꺼져가는 따뜻함이었다. 새까만 따뜻함이었다. 그 새까맣고 따뜻한 "죽어감"의 느낌이 강렬해질 때마다 그것은 점점 밝아졌다.

단백질과 수분. 내 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 두 성분은 나의 육체를 이루는데 많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는 동안 그것은 따스함을 갖고 있다. 빛을 발하지는 못하여 외부의 빛을 반사하여 까맣고 어두운 존재에서 벗어나는 나약한 존재. 외부의 빛이 없으면 스스로를 보일 수 조차 없는 존재. 외부로부터 에너지원이 유입되지 않으면 서서히 식어가는 나약한 존재. 그것은 육체였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살아있음은 새까맣지 않고 어둡지 않으며 지속되는 따뜻함이지만 빛을 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에너지를 통해 따스함을 만들어내었다. 진실한 그 자체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죽음은 새까맣고 어두우며 지속적으로 식어가지만 스스로 빛을 내고 스스로의 따뜻함을 죽여가는 너무나 원시적이고 원초적이며 순결하고 순수한 근본적인 존재였다. 그러한 다름은 형태로서의 다름일 뿐, 서로를 배척하는 다름이 아니었다. 죽음은 다른 형태의 연속이었다. 단백질과 수분, 그리고 빛이라는 외부의 존재에 의존하여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 삶이라면, 외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를 인자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명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고 표현하는 것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살아 생전에는 이를 수 없는 먹먹한 목표이자 방향이었다. 예수, 혹은 부처는 살아 생전에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사실은 조금은 부족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죽음을 통해 부족한 자기 인지를 마쳤고, 그 숭고한 죽음을 통해 그들은 완전하고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살아 생전에 미처 생각도 하지 않았고 느끼지 못한 생각들을 죽음이라는 존재의 빛이 강렬해지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너무 강해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지기 직전에 최후의 깨달음과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위대한 유산을 기록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이 "살아 생전의" 가장 아픈 후회이며 안타까움이었다. 그 후회감과 안타까움이 미처 다 피기도 전에 "나"는 죽음의 새까맣고 어두운 빛에 먹혀 사라졌다.

나는 죽었다. 심장을 꿰뚫리고 두뇌는 멈추었다. 두뇌 속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내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그대로 죽은 것이다. 나의 움직임은 멈추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코를 닫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나의 턱은 살짝 처진 채 침을 주룩 떨구었다. "나"가 죽음으로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가 되었다. 이제 나는 죽음의 형태로 연속해갔다.

그때였다.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분명 죽은 나의 육체 중 손과 팔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다시 분주히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었다. 미처 눈을 덮지 못한 눈꺼풀로 인해 모니터의 출력 화면이 눈에 건조하고 흑백의 느낌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수정체로 흡수되어 시신경을 통해 두뇌로 입력되지 못하고 안구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 기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정체성과 존재감 없이 분주히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감정도 없었다. 혼이 없었다. 그것은 "죽은" 움직임이었다.

눈물. 차가운 눈물. 하지만 손도 댈 수 없이 뜨거운 눈물. 색깔 없는 눈물. 하지만 너무나 파란 눈물. 그것이 죽음 속에서 연속해가고 있는 "나"의 존재의 어느 곳에서 한 방울 뿜어져 나왔다. 눈물이 말을 하였다. 살려줘, 나를 살려줘. 나는 살고 싶어. 죽음 속에 이렇게 사고하며 연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나는 살고 싶어. 꼭 살고 싶어. 누가 나를 살려줘. 누군가 내 심장에 박힌 저 물질을 뽑아내줘, 그리고 내 두뇌에 질문을 던져줘. 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계속 질문을 던져줘. 내 심장에 박힌 저것을 빼고 내 두뇌를 향해 질문을 던져줘. 그렇게 나를 살려줘. 공허한 메아리 하나. 둘, 그리고 셋.

나는 죽음으로 연속을 진행해가며 삶을 꿈꾸었다. 삶 속의 몽상가가 아닌 죽음 속의 몽상가가 되어 삶을 꿈꾸었다. 계속 삶을 꿈꾸었다. 시간조차 의미를 갖지 못하는 끝없는 연속의 연속인 죽음 속에서 "나"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삶을 꿈꾸었다.

삶일까? 무엇을 꿈을 꾸는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꿈이 연속을 진행해주는 것인지, 연속의 진행이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시간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그 "때"라는 말이 내게 작은 혼란을 주었지만, 그 때는 내게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기에 그 "때"라는 것이 어떤 때인지 더 파고들고 싶지 않다. 그 "그때"에 무언가 나를 깊이 찔러 뚫고 지나갔다. 느낄 수 있었다. 느껴진다. 피라는 수분이 존재할 리 만무했지만 피를 흘리는 고통을 느꼈다. 눈이 매웠다. 투명하고 맑은, 하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여 슬픈, 그런 눈물 방울 하나가 눈에서 방출되었다. 허어어어... 깊은 숨 하나가 기도를 타고 폐를 향해 날아갔다. 바스락 바스락 건조한 스펀지에 붉은 잉크가 눈꺼풀 닫고 여는 찰나의 순간에 흡수되듯이 폐는 반갑게 공기를 맞이하며 흡입하였다. 산소가 많지 않은 탁한 공기였지만 반갑게 맞이 하였다. 코에서 죽음의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눈물을 방출한 눈에는 그제서야 모니터가 출력하는 화면의 내용이 반사되지 않고 시신경으로 흡수되었다.

헐떡 헐떡. 심장은 자신을 꿰뚫은 그것을 스스로 밀어내고는 대동맥으로 피를 강하게 밀어내기 시작했고 대정맥으로 검붉은 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피는 빠른 속도로 몸을 돌기 시작했다. 두뇌에, 발에, 성기에, 두뇌에. 두뇌가 깨어났다. 두뇌는 방금 전 느꼈던 죽음의 경험을 으스스 떨쳐내버렸다. 그리고 환희에 가득 찼던 자기 인지와 깨달음을 서둘러 지워버렸다. 죽음의 대가로 얻은 깨달음이기에 삶의 대가로 얻고 깨달음을 지운 것이다. 피는 잠시 후 팔을 거쳐 손을 거쳐 손가락에 전해졌다. 손가락은 마침내 움직임이 멈추었다. 죽은 육체에서 바삐 움직였던 손가락이 육체가 살아나자 움직임을 멈추어버렸다. 나는 살아났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사에서 나는 죽음의 애무를 받았다. 지금은 잠시 살아났지만 곧 나는 다시 죽을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하고 코도 열지 못한 채 손가락만이 움직이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심장이 뚫리는 슬픈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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