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단위 후회

요즘엔 하루를 몇 십 분으로 압축해서 사는 것처럼 정신이 없다. 그러다보니 몇 십 분에서 몇 시간까지 손과 머리를 써야 하는 글쓰기는 마치 6,300원으로 황제의 식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느끼는 때와 때 사이는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가령, 때와 때 사이 값 1을 어린 아이가 느끼기에 아마도 하룻밤 정도일 것이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6시간 정도 될 것 같고, 20대 초반엔 잠깐 벌어져서 때와 때 사이 1값은 약 12시간쯤 되는 것 같다. 물론, 이 사이는 상황에 따라서 탄력성 있게 변하는데 얼른 벗어나고픈 위기 상황 직전엔 이 사이가 거의 16배 정도 벌어지고, 칭찬 들을 때는 8분의 1로 줄어든다.

일을 하고 댓가를 받으며 생존하는 흐름과 체계에 몸을 싣고나면 때와 때 사이가 좁아진다. 이 좁은 사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해 그 사이를 벌리거나 그 틈이 좁지 않다고 자기 최면을 건 채 외면하고 사는 것이다.

후자를 택하면 그동안 쌓아놨던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떼어다 팔며 사는 것이다. 무형인 능력을 다 떼어 팔고 나면, 남은 것은 유형인 몸뚱아리 뿐이다. 몸은 완전 충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몸을 굴리고 충전하다보면 어느 새 완전 충전을 했다고 느끼지만 한창 때에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다. 건강이 나빠지든 나이를 먹든 하기 때문이다.

전자를 택하면 능력을 계속 갈고 닦고 쌓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거나 다른 개체와 엮이는 접점이 늘어날 수록 때와 때 사이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신경 쓸 게 많으니까. 다행스러운 점은 능력, 지식, 지혜는 완전 충전이 가능하며, 확장도 가능하다. 그래서 때와 때 사이를 좁히는 보이지 않는 힘은 갈수록 강해지지만, 그에 맞설 능력도 강하게 할 수 있다.

문제는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면 때와 때 사이를 좁히는 보이지 않는 연합군의 힘이 훨씬 세다는 데 있다. 갈수록 세진다. 그래서 때와 때 사이가 여유롭고 이 사이를 좁히는 힘이 약한 시기에 능력, 지식, 지혜를 열심히 키워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 기초 학문을 최대한 많이 열심히 해야 한다. 때와 때 사이를 좁히려는 힘에 대응하는 우리 힘의 원천은 기초 학문을 응용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초 학문을 등한시하며 응용 학문이나 처세술이나 응급 처치에 가까운 기만 학문에 의지하는 것은 하루 공부해 하루 팔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들이 찍을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조금 느즈막하게 일어났다. 커피를 마실 때나 쓰던 사마시는 생수에 밥을 말아서 김치와 함께 대충 점심을 떼우고선,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아직 주소지가 경기도 본가에 올라 있어 하남시 어느 동네에 있는 ㅅ초등학교로 투표를 하러 갔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더워서 그런지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예전 투표 때처럼 한산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벗어 내리고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꺼냈다. 샛노랗게 탈색했던 때에 운전면허증을 갱신한 탓에 운전면허증엔 어설프게 사진 합성을 한 것처럼 노란 머리카락으로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 얼굴이 있고, 이 신분증은 종종 내 신분을 증명하지 못한 채 본인 맞냐는 되물음을 받게 한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사진 속 청년이 짓고 있는 어벙한 표정을 재현하며 본인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 몇 시간째 입 꾹 다물고 있다가 숨구멍을 열고 한 첫 마디가 “저 맞아요”라서 목소리는 살짝 삐끗했고, 그래서 어리바리 수치 + 3이 되었다.

권리, 민주주의에서 권리란 곧 권력이다.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소지 별로 구분된 명부에서 내 이름이 적힌 옆 칸에 서명을 하며 슬쩍 위를 보니 아버지 서명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셨다고 하신다. 묻지도 않았는데 당신께서는 아들이 누구를 찍을지 안다며 아들이 찍을 사람을 찍으셨다고 말씀하시고선 웃으신다. 신뢰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적어도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정치성향이 같은 점에 대한 일치감을 담아 웃음으로 대답했다.

어쩌면 주소지를 옮기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마지막 선거 투표가 될 것 같다. 전화 드리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