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중요한 이유.

첫 번째 전제

나는 아직 미성숙하다. 한참 멀었다. 취향과 성향은 있어도 주관과 철학은 부족하다. 그래서 내 철학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판단을 내려야 할 때 내 철학보다는 대다수 사람이 으레 내릴만한 판단을 따른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판단을 내리는 근거는 무엇일까. 대체로 사람들이 그런 근거를 내린 이미 알고 있는 보편타당한 지식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하여 답을 내고 그 답을 따른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할 지식을 상식이라고 한다.

내가 대단히 합리성 있으며 올곧으며 바르고, 설령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더라도 참을 좇아 제대로 된 인식 속에서 끄집어낸 가치관과 생각을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애먼 헛소리 할 바엔 상식을 따르는 것이 낫다. 그러면 상식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전제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 상식이다. 그렇다는 말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각은 누구를 만나든 대체로 수용된다고 볼 수 있다. 1 더하기 1은 2는 상식이어서 누구에게 말을 해도 대체로 먹히지만, 코사인 5는 상식이 아니므로 보통은 옳고 그르고 할 것 없이 말 자체가 먹히지 않는다.

사기를 치면 된다.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다른 이의 입을 짓밟아서는 된다. 하고 싶은 걸 하려고 거짓 근거를 제시하며 선동해서는 된다. 공공재를 개인이 자신의 것인양 해처먹으면 된다. 남의 권리와 자유를 함부러 침해하고 해쳐서는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상식과 비상식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즉, 비상식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되려 비상식이 된다. 내 철학이 못미더어 상식이 기대어 판단을 내렸는데, 그 판단이 사회에서 비상식이 되면

  • 그 사람이 분노에 빠지든지
  • 인지부조화에 빠져 상식과 비상식 사이에서 일관성을 찾지 못해 돌아이가 되든지
  • 비상식을 상식처럼 받아들여 비상식이 사회에 더 만연하게 하는 데 일조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 사람이 한참 배움을 좇거나 아직 가치관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을수록 이런 문제가 생길 여지가 크다.

2008년부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큰 전환 과정을 거치고 있다. 경제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살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던 보편타당한 지식과 질서, 규칙이 뒤엎어져 꺾이고, 현재 비상식이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식이었던 것을 말하는 사람이 비상식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상식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무엇인지가 중요한 이유

상식을 말할 때, 그 시기와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다른 여러 사회를 보나 역사에 비추어보나 몇 년 전 사회에 맞춰보나, 지극히 상식인 것이 오늘날 비상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나 당신을 바보, 멍청이, 병신, 비사회형 사람, 비주류로 만들거나 개념 가득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이다.

그 사회가 다른 세력에 짓밟혀도 지켜내야 할 값진 보물같은 가치관이 있고, 그것이 도덕에 비추어 상식이 되었다면 그 상식에 내 판단을 맡길 수 있다. 즉, 내 미성숙함에 기대는 대신 상식에 기대어 판단을 내려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사회를 채우며 상식으로 자리 잡아가는 비상식을 깨뜨리러 짱돌을 들고 뛰쳐나가 내던지는 것이 낫다. 감이 안 온다면 앞서 언급한 상식에서 “안”을 뺀 문장을 상식이라고 해보자.

사기를 치면 된다.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다른 이의 입을 짓밟으면 된다. 하고 싶은 걸 하려고 거짓 근거를 제시하며 선동하면 된다. 공공재를 개인이 자신의 것인양 해처먹으면 된다. 남의 권리와 자유를 함부러 침해하고 해쳐도 된다.

끔찍하지 않은가?


사회총지식 (Gross Societal Knowledge)

사회

사회는 여러 종류가 있다. 학교, 기업, 작은 모임, 비공개 모임, 경제 사회, 삽질 사회, 사기 사회, 비상식 사회, 유치한 사회.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였다는 점인데, 사회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터 드러커는 오늘날 사회는 지식 사회이며, 지식 사회를 구성하는 지식 노동자가 성과를 올리는 데 필요한 연속성, 계속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조직뿐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사회가 조직사회가 되는 것이라 했다.

조직과 사회는 다른 말이다. 이 구분 역시 피터 드러커의 말에서 따오자면, 조직은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전문가로 구성된 인적집단이며, 조직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과제를 담당하는 사회를 위한 기관이다. 즉, 사회 속에 조직이 형성되는 것이다.

국내총생산

국내총생산(GDP : Gross Domestic Product)이란 나라 안에서 이뤄지는 생산 총합이다. 이 수치가 클수록 그 나라 경제력이 높다고 본다. 물론, 몇 가지 한계점이 있지만, 범세계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를 따르므로 대체로 GDP가 나라 경제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GDP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생산한 생산물로 경제 활동을 하면 된다. 다소 무식하게 추상화해서 비유를 들면, 쌀 농사를 지어 혼자 먹는다면 경제 활동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GDP로 봤을 때 0원이다. 그러나 이 쌀을 누군가에게 판 뒤 그 돈으로 보리를 사다 먹으면, 심지어 자신이 판 쌀을 되사도 이는 경제 활동으로 측정되어 GDP 수치는 오른다.

참 불합리하고 모순된 것 같지만, 경제 사회(경제 체제)에서 생산물을 사회에 유통하여 현금이든 개인 만족감이든 가치를 일으키는 현상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므로 GDP 총액으로 각 나라가 가난한지 부자인지를 따지기보다는, 가치 생산 활동과 거래 활동이 일어나는 정도가 얼마만큼 되는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을 참고하는 것이 낫다.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를 가를 것 없다.

개개인이 가진 어떤 가치, 위 비유로 보면 생산물을 다른 이가 가진 것과 교환을 할 때, 각 각이 가진 가치 크기를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돈이라는 도구를 만들어서 거래를 한다. 자신의 생산물로 돈을 산 뒤 이 돈을 팔아 다른 이의 생산물을 산다. 참 쉬운 개념이며 흐름이다.

사회총지식 (Gross Societal Knowledge)

앞선 단락에서 낱말 몇 개를 바꿔보자. 경제 사회는 지식 사회, 생산물(가치)은 지식으로 바꾸어서 경제 흐름을 보면,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지식 총합을 사회총지식(GSK : Gross Societal Knowledge)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생산물을 거래하는 경제 활동이 GDP를 키우듯, 지식 사회에서 지식을 거래하는 활동이 사회총지식(GSK)를 키운다. 꽉 움켜쥐고 혼자만 알고 있다면 그 지식이 사회에서 가치로 환원되는 값은 0에 가깝다.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관계도가 10이라면 그 지식은 0에서 10 사이 정도 되는 사회 가치일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얼마라도 받고 지식을 공유한다면 그 지식은 비로소 10 이상이 될 수 있다. 여전히 10 미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10 이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경제 거래 개체는 거래값이 0에 가까워질수록 경제 총합이 함께 떨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간단히 말해서 한 사람이 쌀 1kg을 각각 100명에게 100원에 팔면 그 사회의 총생산은 10,000원이 되고, 50원에 팔면 5,000원이 되는 것이다.

사람 수  X 개체 거래 값 = 가치 총합

이에 반해 지식 거래 개체는 지식 거래 값이 0에 가까워질수록 지식 총합이 늘어난다. 지식 하나를 100명에게 100원에 팔면 그 사회의 지식 총생산은 10,000원이 되고, 50원에 팔면 20,000원이 된다. 단, 지식을 팔면 그 지식을 고스란히 전수받는다는 전제를 따른다.

사람 수 * (지식개체 값 / 지식개체 거래값) = 가치 총합

즉, 지식은 공유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낮출수록 그 사회는 물론 지식 자체 가치도 오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은 거래해서 취득하는 목표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나 도구에 가깝다. 제조 활동으로 보면 원료(resource)이다. 개개인은 가진 지식 자산을 이용해 취득한 지식을 재생산할 수 있다.

지식은 누구나 다가와 나눌수록 사회 속에서 더욱 커진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그 혜택을 기꺼이 누릴 수 있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눔을 개방(Open)이라 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식 사회이면서도 경제 체제 사회이므로 무료(Free)도 아주 간과할 순 없다. 쌀수록 접근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즉, 무료가 개방은 아니지만, 무료가 개방성에 도움을 준다.

아주 작은 사회 하나를 예로 들자면, 내가 벗 한 명을 불러내어 내 지식을 공유한다. 대가를 받고 지식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수다 떨듯이 가볍게 맥주 한 잔 나누며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비용과 그가 느끼는 비용은 기껏해야 맥줏값 정도이지만, 나와 벗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내가 공유한 지식은 더욱 풍부해진다.

사회총지식이 그 사회가 가진 지식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GDP가 각 나라의 경제력을 나타내듯이, 지식 사회에서 사회총지식은 그 사회의 지식 경제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지식이 곧 경제 가치로 환원되는 오늘날에는 사회총지식 총합이 클수록 경제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자원이 많다는 말이 된다. 가정이라는 사회, 회사라는 사회, 나라라는 사회 가를 것  없이 사람이 모여 함께 엮이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라면 지식이 그 사회를 덩치나 알맹이 모두 키운다.

사회 차원에서 지식 생산을 놀리는 방법은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개방(Open)을 하여 폐쇄성이라는 비용을 낮추고, 경쟁, 돈, 계층이라는 값비싼 접근 비용 역시 낮추어야 한다. 작게는 내가 가진 지식을 널리 두루 공유하고, 크게는 사설 학원보다는 과외 자원 봉사 단체가 늘거나 도서관이 늘어야 한다.

지식을 독점하면 당장은 경제 가치로 바꿀 수 있는 자원이 많아 힘을 얻겠지만, 넓게 보면 그가 속한 사회에 흐르는 사회총지식이 줄기 때문에 사회가 약해져 지식을 독점한 그 자신도 점차 사그라질 것이다. 공유하면서 내 지식 자원도 늘리고, 사회총지식도 늘리는 것이다. 경제는 물가오름세(인플레이션) 위험이 있지만, 지식엔 그러한 위험이 없다.

사회총지식을 너무 어렵게, 넓게 볼 필요는 없다. 내가 속한 작은 사회에서부터 사회총지식을 알아 가면 된다. 그리고 사회총지식을 늘려야 하는 필요성과 이유를 깨닫고 실천하면 된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