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공휴일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구나
24 Dec 2003글쎄다.
내가 최근 외로움을 느껴서일까. 세속에 관심을 더 갖기 시작해서일까. 집중할 뭔가를 찾지 못해서일까. 정신을 못차려서일까. 컴퓨터가 느려서일까. 피곤해서일까. 악당이어서일까. 스타크래프트를 잘해서일까. 최근 독서를 게을리해서일까. 1년이 365일이어서일까. 팬티 색이 검정색이라서일까. 귤을 맛있는 놈으로 사와서일까.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글쎄다.
애인이 있었을 때에도. 애인이 없었을 때에도.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지금보다 더 속 늙었었을 때에도. 지금보다 배가 고팠을 때에도. 지금보다 갈증이 더 났을 때에도. 지금보다 인기가 있었을 때에도. 지금보다 인기가 없었을 때에도. 지금보다 노래 부르는 목소리톤이 높았을 때에도. 지금보다 노래 부르는 목소리톤이 낮고 걸걸 거렸을 때에도.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좋건 싫건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내일은 공휴일인 크리스마스이다. 그런데 올해는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분명히.
물론.
확실히.
눈에 띄이게.
실감 나게.
시끄럽게.
왁자지껄.
해가 거듭 될 수록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화이트 데이 같은 날들이 화려해지고 철 들지 않은 미운 7살의 소년처럼 변해가긴 하다. 고요한 밤보다는 징글벨이 더 익숙해지는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러하지만.
(.......또 갖다 붙일 말이 뭐가 있지?)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내 성격은 벌렁 거릴 수 있는 내 코보다, 옴찔 거릴 수 있는 내 귀보다도 둔하다. 귀여운 아가씨가 단지 내가 좋아서 나를 유혹하는 분위기가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나의 견고하고 튼튼하고 우열차며(?) 박스러운 성격이 아니던가.
퇴근 길.
대화/종로 방향으로 올라가는 3호선을 타기 위해 양재역은 사람이 꽉 찼다. 그에 비해 별 거 없는 동쪽으로 향하는 수서쪽은 텅텅. 사람들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길. 지하철역 출구를 나오자 마자 내 귀를 찌르는 것은 날카로운 바람도, 캐롤도 아닌 행사 도우미들의 찢어지는 홍보 목소리였다. 케이크 팔이 아가씨들. 사람들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 혹시 다들 넓은 광장 같은 곳에 다 같이 모여 케이크에 불 붙이고 예수 생일 잔치라도 하려고 그러나? 왜 다들 케이크를 들고 있고, 제과점들은 케이크 상자들을 문 밖에 잔뜩 쌓아두고 파는 거지? 어라 제과점 앞에다 홍보 부스를 차리고 아이스 케이크 파는 써리원(31) 아이스크림 홍보 도우미들은 또 뭐꼬? 」
버스에서 나처럼 홀로 자리에 앉아가는 이도, 한쌍의 연인으로 앉아가는 이들도 케이크를 들고 있다. 그도 들고 있고, 그녀도 들고 있고, 당신도 들고 있다. 우중충한 복장의 할머니와 우중충한 운전 솜씨를 뽐내는 버스 기사 아저씨는 케이크가 없다. 나도 우중충하다. 우리 셋은 케이크가 없다.
어쩌라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회사의 어떤 이는 학원에 가면 여자와 사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정보를 주었다. 글쎄. 굳이 애인을 만들려 하면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쓸쓸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랑 감정을 못느낀 채 의무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볍게 연애만 하며 시간의 주인 행세를 못하게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단지 여자가 필요해서 여자를 사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단지 결혼이 하고 싶어 교제를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를 찾으려고도 노력을 하지 않긴 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교제가 아니다.
어찌 되었건 수면 부족으로 얼굴 살이 모래 빠진 모래 주머니 마냥 줄어들었다. 나는 꿀보다 달콤하고 새벽 공기보다 상쾌하며 이상형보다 가슴 두근거리는 충분한 수면을 할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실감하지만, 그 실감나는 느낌을 수면 부족으로 정의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수면 부족이다. 땅★ 땅★ 땅★
p.s : 유후~ 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말장난을 가득 넣었더니 머리 속이 한결 시원하다. 때 벗긴 기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