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걸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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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은 말 없이 눈물 없이 울고 있다 >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어 한참 상영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다. 이연걸을 좋아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영화 상당 수는 내 취향이 아니었고, 나는 무협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이름이 너무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쌍웅보다는 낫긴 하다) 얼마 전 나는 이 영화를 집에서 보았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본 것이었다. 지금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진시황제가 한참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해가는 과정에서 나라를 잃고 죽임 당하는 나라들이 폭군 진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주인공 무명(無名, Noname)이 진시황제의 수 많은 호위군을 뚫고 진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린다는 내용이다. 비교적 간단하다.

무협의 꽃, 환상 무공의 무술

무협 영화의 꽃이라면 역시 헐리우드 액션 영화의 무한한 총알에 버금가는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지는 무공의 무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역사물을 표방하고 있지만 표현 양식은(?) 무협이고, 무협 영화답게 멋진 무술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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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만개의 화살을 두 명의 특고수가 막아내는 장면 >

내가 무협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점이다. 너무나 어색한 경공 표현, 실타래 인형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 배우들의 무술 장면은 우리 나라의 조폭 영화의 액션 씬(Scenes)만큼 따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웅의 무술 표현은 영화 특수 효과 기술과 CG 발달로 내가 본 무협 영화의 무술 중 가장 멋졌다. 수 만개의 화살을 막아내는 장면, 물 위의 소금 쟁이처럼 튀며 싸우는 장면(상상 속의 싸움이지만) 등은 눈을 사로 잡는다.

그러나.
나의 악취미는 건재하다. 나는 무엇이든 무의식적으로 분석하며 보는 습성이 있다. 나는 장난끼를 발동하여 이 영화의 소리를 끄고(mute) 멋진 전투 장면을 보았다. 과연이로다. CG 나 와이어 액션 등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지만 소리를 다시 켜는 순간 영화의 무술 영상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출과 음향 편집을 아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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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 속에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고수, 무명과 파검 >

이 뻔하고도 뻔한 영상이 깔끔하고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소리와 결합하면서 실제로 착각할 만큼의 실감나는 영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느 무협 영화와는 다른 방향을 걷고 있다. 이 영화의 무협은 주 요리가 아니다. 주요리 삼겹살을 먹기 전의 가벼운 소주 한 잔일 뿐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영웅이라는 영화이다

나는 독특한 느낌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는 특유의 디지털 녹색톤을 영화 영상에서 표현하고 있다. 영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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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에서 흘러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하나를 받아내고 있는 종지 >

영웅이라는 이 영화에 내가 몰두하고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 분위기이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동북아시아의 3강 중 한 나라인 중국 영화이다. 부정의 여지가 없다. 이 영화에는 우리 나라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일본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헐리우드의 첨단 효과를 많이 활용했음에도 헐리우드의 색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색은 고유한 것이며, 그 고유한 것의 근원은 중국이다. 그 고유한 것으로 인해 영웅은 다른 무협 영화와 구분 된다. 한 편의 경극을 보는 듯, 기존의 무협 영화들이 가지지 못한 중국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잠시 내가 좋아하는 영상 일부를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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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무술들이 돋보이는 것은 첨단 특수 효과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만의 분위기 속에 무술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양인만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문화적 코드

내가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또 하나는 동양인이라면 아무 혼란과 의문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정신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고수는 상상만으로도,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싸움을 할 수 있고 답을 내릴 수 있다. 검이라는 글자 하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라가 멸망해가지만 글자를 씀으로서 정신까지 점령당하지 않으려는 장면, 촛불의 흔들림으로 심경을 읽을 수 있다는 장면 등은 대단히 동양적인 Scene 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에게 스승과 제자의 복잡한 의미와 일치하는 영어 단어가 없는 한 서양인들에게 이 Scene 들의 이해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정신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보다 중시하는 동양의 문화적 역사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나 염원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칠까봐...

이 영화의 사랑은 절제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직설적이지 않게, 하지만 매우 직설적으로 비설과 파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내내 드러나지 않은 이 연인의 사랑은 공교롭게도 영화 후반, 이들이 함께 죽음을 맞이하면서 완연히 전달된다. 후반의 그 한 장면으로 영화 내내 녹아들어 있던 서로의 사랑이 「 아... 그래서 ... 」라는 탄식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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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설 : 왜 피하지 않았나요 ...
파검 : 당신이 다치니까 ...
(영화 中)

영웅

이 영화에서 말하는 영웅이란 무엇일까. 적을 수 없이 베어버리고 아군의 안녕을 유지하는 이일까. 아니면 적을 짓밟고 아군의 힘을 최고로서 세상에 알리는 이일까? 이 영화에서 말하는 영웅은 우리가 그간 생각하던 영웅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진정한 영웅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매트릭스의 절대자(The one)인 네오와 동일한 대상이다)

마무리

나는 이 영화는 현존 무협 영화의 최고라고 주장할 수 있다. 가장 무협스럽고 가장 동양적이며, 자신네 문화의 색을 가장 확실하게 띄고 있다. 부정의 여지가 없이 이 영화는 중국 문화의 영화임을 누구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강력한 설득력. 나는 그 점에 열광한다.

영화를 수 차례 보며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슬프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은 그네들만의 문화 코드를 가지고 있다. 홍콩 역시 (내 취향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건) 그네들만의 문화 코드를 가지고 있다. 중국 문화권의 영화도. 그러나 우리 나라의 영화는 아직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영화를 몇 편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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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여형사 다모 中.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상이다. >

우리의 영화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의 독특한 느낌, 드라마 다모의 저 장면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그 어떤 문화적 코드가 섞이지 않고 우리네 판소리나 사물 놀이처럼 고유의 문화적 색을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 영화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영웅이라는 이 영화는 영화만의 느낌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고, 그것을 느끼며 한 없이 부러워질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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