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29 Jan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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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상 받은 영화야
2003년 봄. 강서구 화곡동쪽의 회사를 다닐 때였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지하에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같은 CF 몇 개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너또645 광고, 조선소일보, Matrix-Reloaded 광고, 이쁜 이나영이 나와서 얼굴로 빛을 내는 화장품 광고,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 영화 광고.
나는 지구를 지켜라에 대해 아무 감흥을 못느꼈다.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홍보 영상 모두 후즐근 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유치한 영화라니.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3류 코믹 영화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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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던 걸까? 이 영화는 실패했다. 개봉한 지 얼마 못버티고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비디오와 DVD 로 출시 되었다. 비디오 가게에서도 이 영화 포스터가 금방 사라진 걸 보면 홈비디오 시장에서도 실패한 모양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얼마 전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모스크바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들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구를 지켜라 감독인 장준환 감독이 이 모스크바 감독상을 분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감독상 분실과 보고 싶은 생각이 어떤 관련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우물 쭈물 대답을 못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기가 내게 마련된 것은 사실이다.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이제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다루려 한다. 만일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면 이 글을 보지 말자. 이 영화는 화려한 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배우들이 옷 홀딱 벗고 레슬링하는 영상도 없다. 내용 말고는 볼 것이 없다. 내용 말고 볼 게 없는데 내용을 여기서 보면 이 영화의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물론 식스센스나 유즈얼 서스펙트처럼 뒤통수 후려갈기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반전이 있지만 그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주장과는 전혀 틀린, 어설픈 서비스 정신에 의거한 웃기려는 시도일 뿐 반전축에도 못낀다. 뭐, 이 영화가 코믹 영화였다면 반전이라고 쳐줄 수 있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 영화는 코믹 영화가 아니라는데 있다)
선택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마음이다.
당신. 외계인이지!
이 영화의 제목은 지구를 지켜라이다. 내용도 주인공이 지구를 지켜 내려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뻔뻔한 헐리우드 영화가 아니다. 미국이 지구를 지키거나 평화를 지키는 구도가 아니다.
주인공 이병구는 외계인을 색출해내어 그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사살하는 독특한 포유류, 지구인이다. 이병구는 외계인을 혐오하고 증오하며 미워하며 싫어한다. 그들이 이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으며 자신의 엄마를 죽였고 자신의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지구라는 건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의 표현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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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인권 탄압과 유린 등.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꼴을 못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 자신은 안녕을 누리지만 밑의 것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누리게 하지 않는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인간이라면 같은 종족에게 차마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외계인이기에 할 수 있다. 그들이 외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러한 쳐죽일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병구는 지구, 아니 인간의 사회를 부패시켜가는 외계인을 색출하며 지구를 지킨다.
...고 이병구 자신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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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외계인들은 서로 텔레파시로 교류하며 끈끈한 결속력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며 산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이 검은 인맥을 통해 폐쇄적으로 살며 자신을 보호 하듯이.
텔레파시를 교류하기 위한 안테나는 몸에 난 털이다. 이병구는 생포한 외계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삭발시킨다. 텔레파시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의 연락망을 끊는다. 사회에서 격리 시킨다. 인맥을 끊는다.
즉 외계인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을 의미하고 지구는 약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런 사회 부조리를 씹는 영화나 노래 같은 문화 컨텐츠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씹어대서 이젠 국물 빠진 껌 느낌마저 든다. 왜 그럴까?
너무 많은 이들이 불만을 표출 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쏙 빼놨기 때문이다. 뭐라고 욕 해대니까 흥미로워서 가만히 앉아 들었는데, 듣고 나니 「 그래서 어쩌라고? 」 라는 반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번이지.
장준환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무얼까? 사람 마다의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아래의 장면들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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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며 조롱하는 모습과 짓밟힌 삶을 동정하며 슬퍼하는 모습. 하지만 사실 동정하는 모습은 그네들도 짓밟히며 사는 약자들을 동정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들은 자신이 짓밟았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갔을 뿐, 나아가는 발걸음에 걸리적 거리는 것이 니네였을 줄 몰랐기에 동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 것이다. 만일 알았다면 애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같은 인간에게 말이다.
연출
연출은 깔끔하다. 영화 곳곳에서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연출적 장치들은 나를 즐겁게 해준다.
특히 즐거웠던 장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이병구(신하균 역)가 키우는 개의 이름이 지구인 점이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에게 짓밟히는 약자를 지구로 표현했는데, 그 지구가 하필 개다. 개같은 인생이로다. 하지만 이병구에게 잡힌 외계인들(으로 이병구에게 판정 받은 사람들)은 지구라는 개에게 잡아 먹힌다. 니들이 우릴 개같이 살게 해도 결국 니네는 우리(개새끼들)한테 먹힌다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두 번째는 동전이다. 영화에서 이병구를 오랜 시간동안 추적해오던 형사는 자신이 복권에 당첨될 확률을 50% 라고 한다. 당첨 되느냐 되지 않느냐. 동전의 한 면이 나오는 확률도 50% 이다.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질 때 동전은 죽은 생선의 핏물 속의 동전은 숫자 면이 위로 나온다. 그러나 사건이 풀릴 단서가 발견될 때, 그 단서를 가려왔던 것은 동전의 그림 면(학이 그려져 있는)이다. 사건이 풀리느냐 풀리지 않느냐로 사건 해결 확률을 50%로 봤던 형사의 말을 멋지게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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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코믹하지 않은 이유
이 영화는 코믹물이라고 홍보를 했다. 홍보 영상도 코믹물처럼 보이려 했고 포스터도 그런 뉘앙스를 강하게 뿡뿡 풍겨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코믹물이 아니다. 물론 웃기는 장면들이 나온다. 특히 이 영화에서 「 이 부분에서 니네들 웃어야 해~?!」 라고 말을 하는 듯한 고문 장면들은 웃기다. 그러나 웃기지 않다. 고문의 발상들은 재밌다. 예를 들면 물파스로 눈이나 상처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리해서 보여줌으로서 웃기다 말아진다. 도끼로 정강이 뼈를 부러뜨리거나, 못으로 손을 관통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웃기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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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 오빠. 효과가 있나봐. (+_+)
이병구 : 골고루 발라!
(발등에 상처를 낸 뒤 그 부위에 물파스를 바르며)
어느 영화건 웃기는 장면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웃기는 장면이 나온다고 그 영화를 코믹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코믹물이 아닌 이유는 이 영화가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다. 웃을 맛을 잃게 만드는 잔인한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트루먼쇼와 같은 영화를 기대한 것은 사실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실망한 것은 고문 장면들이 아니다. 코믹하지 않은 것을 코믹하다고 홍보를 한 마케팅 전략에 실망한 것이다. 그 엉터리 전략이 아예 이 영화를 볼 마음조차 들게 하지 않았기에 난 화가 났고 실망한 것이다.
마무리
이제 마무리하자. 이 영화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지루함 없이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점에서 잘 만든 영화이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병구가 외계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자신의 복수도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난 그 장면이 편집되어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난 그 장면을 감독의 소심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병구가 외계인들을 작살내는 것에는 사실 개인의 소소한 복수심도 있다는 설정. 똥 싸는 데 화장실 독채 냈냐는 아버지의 꾸중에 똥을 끊은 느낌이 들었다. 이외 위에서도 언급한 필요 이상의 자세한 고문 장면 묘사도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비록 분실했지만 모스크바 감독상을 받은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마케팅의 삽질과 Matrix Reloaded 개봉 등 여러 가지 악재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것은 영화가 못나서가 아니다. 영화는 잘 만들어졌으며 아직도 이 영화가 3류 코믹물이라는 생각에 선뜻 볼 생각을 못하는 이들에게 보기를 권하고 싶다. 영화를 권하며 조금은 묘한 느낌이 드는 장면으로 지구를 지켜라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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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꿀을 채취하기 위해 평생 일을 하며
갇혀 사는 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우리 지구는 벌꿀 채취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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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Staff Scroll 에서)
p.s : 영화 중에 이병구가 학생 시절에 이병구를 두들겨패는 선생이 나온다. 영화 엔딩 Staff Scroll 에 보면 동북 고등학교 이강포 선생님이라고 나온다. 난 몰랐는데 나의 모교였다. --;
동북고등학교 홈페이지(클릭) 에서 '이강포'로 검색해보시라. 담당 업무가 정말 멋지다. 으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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