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인간, 철학적 인간

나는 나일까, 나라는 DNA 일까?

(사진 출처 : YES 24)

인간에 대한 정의는 예부터 머리 맞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도전해보는 과제이다. 정의에 따라 병아리가 인간이 되기도 하고, 침팬지가 인간이 되기도 한다. 과학자, 정확히는 생물학자들이 살갗 다 까지도록 이마 맞대고 연구하고 있을 때, 철학자들의 인간 정의는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많은 지지를 얻는 정의가 내려졌나니, 사고(思考)를 하는 포유류란다. 더 이상 논박의 여지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 종족들이 파악한 사고를 할 줄 아는 포유류는 인간이 유일하니까.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생물학의 한판승으로 보이는 듯 하다. 철학적 정의가 말 장난으로 보이기는 한데 반박할 말을 만들 수 없어 찝찝해하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생물학은 인간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어 환호성을 이끌어 냈다. 인간만이 가진 DNA 를 가지고 있으면 인간이고,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즉 인간이란 인간 DNA를 지칭하는 것이지, 하나의 인간이라는 객체는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덕분에 내가 내 DNA 의 주인인지, DNA 가 내 주인인지 질문거리가 하나 더 생기긴 했다. 내가 주인이라면 난 나라는 정체성/고유성의 복제를 위해 DNA 를 유전시키는 거겠고, DNA 가 주인이라면 난 DNA 자신이 자신을 계속 유전하기 위해 나를(내 두뇌를) 지시하는 거다. 심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철학적 인간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여지껏 접해본 철학적 인간의 정의들은 대게 다른 생물보다 인간이 이런 점이 더 우월하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글쎄. 뭘 근거로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먹이 피라미드에서 최상위에 위치했으면서 그 수도 엄청 많으니 우월한 것일까? 세균 만세.

이 책은 이런 나를 위해서 아주 잘 나온 책이다. 생물학의 많은 서적들을, 철학의 많은 서적들을 지금은 읽고 싶지 않다. 아직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더 많다. 이 책은 생물학자 장 디디에 뱅상에 의해 쓰여진 생물학적 인간의 정의 챕터(Chapter)와 철학자 뤼크 페리에 의해 쓰여진 철학적 인간의 정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대립의 위치에 서있는 두 명의 똑똑한 사람이 티격 태격 싸우는 걸 책으로 다듬은 것이다. 번역이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3번 정도 읽으면 번역체의 완역도 가능하다.

사실 이 책을 살 생각을 한 것은 기획의 발상(idea)을 얻기 위해서였다. 신문에서 유일하게 머리 덜 굴리며(그 외에는 기자의 잔머리 굴린 정치 내용을 찾아내느라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한다) 보는 책 소개 코너(Corner)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노래가 절로 입에서 방출될 정도였다. 깊지는 않지만 가볍지도 않게, 두 똘똘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 철학과 생물학의 인간에 대한 학문이 우습게 보이더라. 멋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