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와 사랑에 빠지기
06 Oct 2005난 감정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감정으로 표현되는 감성도 이성이 만들어낸 작은 존재일 뿐이라 생각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 내 눈을 통해 그녀를 인식하는 것은 내가 그 여자를 봤기(look) 때문에 아니라 단지 그 여자가 내 눈에 보이기(see) 때문이다.
내가 이 여자에게 사랑하게 되어서 열병이 들려면 단 한 가지만 행하면 된다. 그 여자를 계속 생각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좋다. 며칠 전, 무심히 눈에 보였던 그 여자가 입었던 옷이 무엇이었더라? 그 여자의 머리카락 모양은 어떠했더라?
그 여자에 대한 단촐한 정보 몇 가지를 토대로 계속 떠올리다보면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그 여자에 대한 상상으로 어느 새 바뀐다. 머리로 떠올리던 일이 어느 새 마음으로 떠올리게 된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머리 속에서 떠올렸던 그 여자에 대한 여러 모습들과 실제 모습들을 맞춰보게 된다. 일치하면 아무 이유없이 웃음과 미소가 나오고, 일치하지 않으면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증이 더 커진다. 머리에서 이뤄지는 그녀에 대한 생각은 마음에서 이뤄지는 그녀에 대한 상상에 짓눌리는 상황이다.
그 여자를 잊는 방법은 그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만큼 간단하다.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설혹 마음이 머리를 삼켰을지라도 한번쯤은 마음이 아닌 머리로 그 여자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여자와 결혼해서 함께 사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하는 때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떡해서든 그 여자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고,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면 나를 휘감았던 불치병은 보이지 않게 느낄 수 없게, 하지만 분명하게 잊게 된다.
이제까지 했던 말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내게 일어나는 감정들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너무나. 너무할 정도로. 이 쉬운 감성의 꿈틀거림에 휩쓸리고 애닳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내 감성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던 그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얼마 있지 않아 무심한 존재가 되곤 한다.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아직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엉뚱한 상상도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고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