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이유
14 Mar 2005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 「 당신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는 글에 난빈님께서 남기신 의견에 답변과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글의 성격상 존칭은 생략합니다. ※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이유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에서 노약자를 만나면 자리를 양보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반드시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양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즉 양보는 의무가 아닌 선택이라는 말은 일견 옳다. 공공의 시설이며,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말은 사회라는 체제와 체계, 조직을 구성하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회에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원(사회인)은 사회성이 작용하는 사회 공동체-학교, 직장, 가정 등-에 속해 있는 모든 이를 가리키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회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된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성격과 사고방식을 구분하고 분류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사회 공동체 측면에서 판단하여 구분했을 때, 사회적인 사고방식과 비사회적인 사고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회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경험, 즉 인습과 관습이다. 오랜 세월 쌓인 인습과 관습이라는 정리되지 않아 무질서한 형태의 경험을 예절, 인의, 도덕과 같은 형태로 다듬고, 이는 다시 공중도덕이니 식사 예절이니 하는 형태로 잘게 나누어진다. 이것들은 먹고 자고 싸고 번식하는 행위처럼 생존의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사회인으로 사는데 매우 중요한 기본 요소로 작용한다. 오랜 경험에서 사람이 사회인으로 사는데 필요한 점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과 역사에 따라 이것들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회 공동체라는 목표에 향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예로 타인에게 실례를 했으면 사과하고,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하며 노약자는 돕는 걸 들 수 있다. 사과하는 방법이나 인사하는 방법은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다르지만, 각 행위의 목적은 동일하다. 이를 사회 문화라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회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어떤 이도 사회에서 살아가며 다른 이에게 도움이나 배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다른 이에게 고의로, 혹은 실수로 피해를 주거나 아프게 하지 않은 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인으로서 사회의 흐름 속에 살아간다면 누군가의 교류를 하게 된다. 남을 위해 보다 윤택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할지라도 그 영향은 나에게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사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남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중도덕, 예절부터 지켜나가는 생각과 실천이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노력이다. 언젠가 내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듯이, 노약자를 위해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사회를 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만드는 행동들이다.
살인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 것만이 비사회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런 걸 소소한 걸로 치부하는 생각 역시 비사회적인 발상이다. 만일 많은 사회 구성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사람이 살기 아주 힘들게 될 것이다. 우린 환경의 영향으로 사회 문화가 무너져 분쟁 지역이 될 것이다.
사회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모두가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다. 윤택하고 좋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나부터 적은 노력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 적은 노력에는 대중교통 이용 중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이유이며, 이를 지키려 한다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강요성 없는 의무가 될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교과서에 나올 법한 뻔한 얘기만 길게 나열했다. 그렇다고 해서 글의 최초 대상인 난빈님을 가르치려 들려는 건 아니다. 생각과 실천 모두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기본이기에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례와 결례이기 때문이다.
씁쓸한 기분이다. 자리를 꼭 양보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은 아름답지 않다고 쓴 표현을 문제가 되었으면 이런 씁쓸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거 같다. 물론 난빈님은 분명 표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표현을 지적한 근거로 자리를 꼭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
사람마다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다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일 내가 나이가 들어 힘도 부족하고 등이 굽어 손잡이를 잡지 못할 때, 난빈님의 논리를 드는 이가 있다면 많이 슬플 거 같다. 뭐랄까. 반달님의 참을 수 없는 "민족"의 가벼움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가 읽고 난 후 시선 끝에 맴도는 쓴맛 같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