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글쓰기와 자판으로 글찍기
13 Mar 2005존경하옵는 김성동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술의 발전으로 요즘엔 글을 쓰지 않고 찍는다고(이런 내용이라는거지 실제 말씀은 더 멋지다). 머리에 콱 박힌 이 말씀은 천자문과 생각을 모두 손으로 쓴 그의 책에 담겨 있다.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두려움을 갖지 않는 시대의 변화가 글쓰기 욕구를 일으킨다면, PC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는 글쓰기를 유도한다. 그래서 글을 늘 써야 하는 뚜렷 목적이나 동기가 있지 않아도(예를 들면 직업이 작가나 기자인 경우)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내 생각을 그다지 노출하지 않았었다. 내성적인 성격이 지금보다 강했을 뿐더러 세상에는 나 말고도 잘난 사람이 많아 내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상당 수는 이미 누군가 시나 저서 등을 통하여 표현 했기에 내가 하는 말이 인용이 되는 상황이 싫은 오만한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수 년을 땅 속에 있다가 허물을 벗고 땅 위로 나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처럼,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변비에 시달리다 시원하게 배설하는 이처럼, PC를 통해 온라인에 접속하게 된 이후 나는 많은 글을 찍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대하는 내 이중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편한 것이 큰 이유이다. 또한 글자만으로 본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오해를 사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질 급한 사람에 의해 내 말이 끊기는 일도 없고 상대나 내 말 하나 하나를 기억할 필요도 없어서 의사 소통도 아주 편했다.
블로그를 통해 자판으로 글을 찍다보면 당황스러운 경우를 종종 겪는다. 글을 쓰면서 글자나 문장을 옮기다가 맞춤법을 틀리는 건 물론이고 매우 괴상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경우인데, 이는 편집이 쉬운 상황이 원인이다.
이를테면, 「 ~~라고 한날은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한날씨는 ~라고 말하였다고 대답했다. 」 라는 문장에서 한날과 한날씨의 위치를 바꾸느라 「 ~~라고 한날씨은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한날는 ~라고 말하였다고 대답했다. 」라고 문장을 만드는 경우이다.
마무리 다듬기를 하면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수정이 쉬운 PC에서 글쓰는 환경의 특성상 오타 없이 글을 제대로 작성했다고 나를 과신하기 일쑤이다. 손으로 글을 쓸 때는 다 쓴 뒤 글을 쓰는데 들인 시간만큼 공과 시간을 들여 글을 다듬지만, 자판을 통해 찍은 글은 그만한 노력을 들이지 않곤 한다.
다행히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많아 어지간한 이상한 문장이나 잘못은 알아서 교정하며 내 글을 읽어준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난 뒤에 내가 내 글을 읽으며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곳을 틀리면 사소함의 반비례하게 부끄럽다.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 중 국어 과목 시간에 글 쓰기에 대해 배운다. 글자나 문장의 앞뒤를 바꾸거나 불필요한 글자를 빼주는 등의 퇴고 기법도 배운다. 이런 퇴고를 중고등학교 졸업 이후 보게 된 곳은 얼마 전 다녀온 신병교육대대였다. 동기 중 한 명이 잘못을 하여 진술서를 작성하였는데, 조교가 퇴고 기호를 사용하여 문장을 교정해놓았더라.
아아. 그렇지. 그래.
퇴고는 내가 종종 저지르는 오타나 편집에 의해 탄생하는 이상한 문장을 고치는 것보다는 글의 내용과 문장을 다듬는 절차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퇴고에 오타를 잡는건 포함되어 있다만, 엄밀히 말해 퇴고는 글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인식한 상태에서 글을 완성시키기 위해 덧붙이고 잘라내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된 퇴고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타를 찾아내는 퇴고 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공해이다. 세상엔 많은 글이 있다. 그 많은 글에 글을 추가하면서 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행위는 말 그대로 배설 수준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애꿎은 키보드에 탓을 돌려본다. 내 마음가짐을 탓할 엄두는 내지도 않으면서.
덧쓰기 : 내가 쓴 글에 애착을 갖고 욕심을 많기에 "공해"나 "배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일 뿐, 오타나 잘못된 문장이 있는 글을 "공해"나 "배설"이라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