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광주 답사기

광주에 갈까?

2005년 6월 첫째 주 초. 며칠 뒤면 연휴였다. 마님과 나는 콘도를 빌려 연휴 동안 스타워즈 기존작들을 모두 보고 연휴가 끝난 뒤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을 보려 했다. 나름의 알차고 명랑한 휴가 계획. 그러나 알찬 휴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우리 말고도 무척 많았다. 콘도를 잡지 못한 우리는 이번 연휴에 아무 곳에도 못 가고 집에서 굴러야 하는 거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내 머리에 광주가 번개처럼 스쳤다. 실은 꺼칠이님과 MSN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떠올랐다.

2005년 3월. 회사를 옮기게 되었고, 새 회사에 가기 전까지 며칠의 짬이 있었다. 예전부터 꺼칠이님 보러 광주에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마땅찮아 가지 못했다. 이번이 기회이다 싶어 나는 광주 방문 계획을 짰고, 어느 덧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 6월이 되었다. orz 광주에 간다고 하고선 매번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한(않은) 것이다.

음식도 맛있는 문화의 지역, 광주! 마침내 광주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만, 출발부터 삐거덕거렸다. 내 차를 아버지께서 끌고나가셔서 아버지 차와 바꾸러 아침부터 연신내까지 갔고, 차를 바꾸고 광주로 향하는 힘찬 시동을 걸자 마님의 오라버니께서 사용하시는 GPS는 기절하시고 만다. 모르는 길로 운전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나이기에 광주 여행을 확 취소할까 고민까지 했다. 마님의 설득으로 결국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광주를 향한 힘겨운 여행길

아침 10시에 출발한 우리는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경기도 하남시 부근에서 버벅대고 있었다. 난 부지런하게 금요일(3일)에 미리 고속도로를 탈 것이지, 게으르게시리 이제 와서(4일, 토요일) 고속도로 탄다며 내 앞과 뒤, 그리고 옆을 가득 메운 다른 차들을 향해 구시렁거렸다. 한참을 버벅이며 갔을 때, 광주를 가려면 이리 오라는 표지판의 기호를 발견했다. 나와 마님은 뻥 뚫린 광주행 분기점 도로를 향해 달리며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꿈틀대는 차들을 보고 비웃었다. 짜식들, 나처럼 광주로 놀러가면 길도 안막히고 좀 좋으냐! 라며.
잠시 후, 우리는 경기도 광주 톨게이트에 2천 원 가량을 지불하고 좌절해야 했다.

애꿎은 표지판과 GPS를 구박하며 몇 십분 전에 우리가 비웃었던 긴 차 행렬에 슬쩍 끼어 기어가기를 몇 시간. 우린 여전히 경기도 땅 위에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우리를 기다리는 꺼칠이님 일행에게 먼저 식사하며 즐기라고 연락한 시간은 오후 7시에 가까운 때였다. 기절하신 GPS(PDA)를 간간이 깨우기 위해 사람의 헛된 욕망을 행하기도 하고, 과자로 입과 배를 달래며 한참을 달리고 서기를 반복하며 대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9시경. 아침부터 부산 떨어서 기껏 도착한 곳이 대전이라는 생각이 들자 대단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각 꺼칠이님은 일행과 함께 쏘시지와 삼겹살을 구워 자시고 계셨다. 마님은 삼겹살 먹고 싶다며 앵앵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내 아랫배도 앵앵거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먹을거리의 위생 상태는 청결함과 먼 친척뻘이다. 내 예민한 장은 휴게소에서 산 음식을 먹으면 텃세 부리며 낯선 세균들과 싸우느라 요동친다.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었지만, 장이 뒤틀리면 이런 느낌일까 궁금증이 일어나는 간격이 점차 짧아져 휴게소에 들렸다 한참을 달렸다.

배고픔에 전라남도 부근의 한 휴게소에서 눈물 젖은 라면과 가락국수(우동)를 먹던 시각은 밤 11시경이었다. 음식 맛 좋다는 전라도까지 와서 30분이나 줄 서서 기껏 먹고 있는 저녁 식사가 휴게소 라면과 스프로 국물 맛을 낸 가락국수였다. 난 라면 정식을 시켰는데 내 뒤 아저씨의 만두 라면과 함께 끓이느라 만두의 느끼함이 국물에서 느껴졌다. orz

신데렐라. 한날렐라. 나는 자정쯤 되면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진다. 졸려서 머리도 아파 온다. 자정 다 돼서 광주 톨게이트에 돈을 납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1시간만 더 달리면 자신이 있는 남원에 도착한다는 꺼칠이님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14시간째 운전을 하고 있는 나는 자정을 넘기며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두통은 시작됐고, 잠은 쏟아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전남대 부근으로 빠져서 부근 모텔(수줍)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참 먼 곳에 있는 모텔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내용은 다음 장에서 계속.

광주 여행

Gloomy Saturday는 가고, 마침내 내가 좋아하는 일요일(5일)을 맞이했다. 길 못 찾을 우리를 위해 차를 끌고 데리러 온 꺼칠이님. 처음 MSN 메신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며 놀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첫 만남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농부 아저씨 같았지만, 첫 만남이라 말을 할 수는 없었다.

1시간 정도 차로 달려서 도착한 곳은 '통나무집'이라는 식당. 어리바리한 고등학생에게 병어와 메기탕을 주문했고, 잠시 후 밑반찬과 숟가락, 그릇 등이 실려왔다. 식당 밖 평상에서 식사를 기다리는 우리 일행은 5명이었지만, 식당 안에서 내보내 준 것들은 4인분이었다. 우리 5명 중 대체 누가 사람으로 안보인 걸까?


저런 식당이 옆으로 주욱 여러 곳 있다.


병어 회를 집어올린 연출된 손은 내 손, 초고추장을 애용하는 왼쪽 손은 성여비님, 오른쪽 손은 꺼칠이님.


얘는 꺼칠이님과 몽실이님이 키우는 뚜치. 저렇게 누웠을 때 뒤에서 보면 물걸레 느낌이 난다.

전라도 특유의 '갈구는' 말장난과 대화에 즐겁게 관전하며 광속의 속도로 식사를 했다. 촌스러운 열무김치와 깻잎 등도 맛있었고, 분위기도 맛있었다. 추어탕보다 조금 덜 걸죽한 국물의 메기탕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뙤약볕에 땀 뻘뻘 흘리며 물가에서 발 담그러 갔다.


내 말이 씨가 되어 과실을 맺었나니... 뚜치는 정말 물걸레가 되었다. 뚜치 수난의 날


즐거워하는 농부, 꺼칠이님

물이라도 끼얹으며 명랑하게 놀아야 했지만, 슬리퍼를 가져오지 않은 나는 물이끼에 넘어질까 봐, 벌레를 무서워하는 마님은 살에 벌레 닿을까 봐 바위에 데워진 미지근한 물가에서 깨작거렸다. 우리를 물가에 데려온 꺼칠이님 일행의 성원에 호응하지 못해서인지 잠시 후 우린 기차 구경하기로 했다. 꺼칠이님 미안~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장이었던 기차 마을(맞나?)이었다. 촬영에 사용한 기차도 있었고, 일정 주기마다 1시간 동안 어디 한 바퀴 돌고 오는 운행 기차도 있었다. 쉴 곳이 적고 좁아 아쉬웠고, 영화의 현장감을 많이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꺼칠이님이 사온 배맛 쭈쭈바에 금방 명랑해졌다. 어디까지 단순해질 수 있을까.


찰칵. 이 미청년은 바로 나다.


마님이 찍은 소나무. 잘 찍었다.


내가 찍은 철로. 엎드려서 찍었는데 참 못 찍었다. 쳇


나 : 우와, 나 사진 되게 못 찍었다. 우엑.
마님 : 왜? 어디 봐봐.
음. 마님은 정말 두상이 동그랗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단체 사진. 왼쪽부터 나, 몽실이님, 꺼칠이님, 성여비님. 찍사는 마님.

뙤얕볕에 지친 일행은 잠시 쉬기로 했다. 차도 팔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아담한 찻집(?)에 가서 팥빙수와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뜨거운 커피 2잔은 꺼칠이님과 성여비님, 팥빙수는 나와 마님 하나, 몽실이님과 꺼칠이님이 하나.


차림판. 나도 가끔 이렇게 초점 맞추는 데 성공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꺼칠이님 : 어디서 그런 이상한 PDA폰을 사서 말이야. 흥.
성여비님 : 그거 휴대전화 모양 과자 아니냐? 흥.
(실은 성여비님은 밖에서 결혼 야외 사진 찍고 있는 광경을, 꺼칠이님은 몽실이님을 보는 중)


몽실이님 : 와아아~ 싸운다. 찍자 찍어.
(실은 꺼칠이님과 성여비님 찍는 중)

피곤한 일행.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나. 앞에 앉은 세 전라도 사람들의 대화가 나를 최면에 거는 거 같았다. 나는 절대 잠을 자고 싶지 않았지만 최면을 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잠들었다. orz

잠시 후 우리가 향한 곳은 소쇄원. 찻집에서 몽실이님이 근처에 소쇄원이 있다고 했을 때, 마님은 소쇄원을 서세원으로 들었다. 히히 바보같이. 실은 나도 서세원으로 들었다. 히히 바보같이.


이곳은 드라마 다모의 촬영지.

소쇄원은 드라마 다모의 촬영지 중 하나이다. 담양답게 대나무 숲도 있다. 넓지는 않지만 한바퀴 돌기에 좋은 아담함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입장료를 낼만한 정도는 아님에도 1000원 정도 입장료를 내야했던 점도 기억에 남는다.


위험하다며 발 동동 구르는 마님을 뒤로하고 바위에 쪼그려 앉아 찍은 나무.


나 좀 살려줘~ 엉엉

시선을 끄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기보다는 뒷짐지고 하닐 거닐며 시야에 사람이 만든 조형물의 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어 산책하기 좋다. 그래서 꺼칠이님과 몽실이님은 함께 종종 와서 다정한 시간을 보냈었나 보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마음에 일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토하고 눈물을 휘날리며 대나무에 매달려 올랐다. 그리고 포효했다. 나 돌아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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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했고, 볼거리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던 마님은 신났다.

와, 정말 길다. 다음 내용은 다음 장에서 계속.

날이 선선해졌다. 이제 그만 가잔다. 고불고불한 산 비탈길을 따라 무등산에서 나왔다. 그곳이 무등산인지 알게 된 건 산에서 나온 뒤였다. 광주에 오느라 12시간 넘게 운전을 하면서 광주 하면 떠오르는 무등산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하루 보내는구나 탄식을 했는데, 어리바리하게 둘러본 곳이 무등산이었다니. 때늦은 새로운 감회가 맴돌았다.

가는 길에 성여비님을 내려주고, 남은 4명은 선미 미용실...로 분장한 꺼칠이님네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정말 순하고 산만한 치와와인 길목이가 처음 보는 우리 일행을 무서워하며 반겨주었다. (순하고 산만하다. 무서워하며 반겨주다. 정말 안 어울리는 표현이다).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술집 부근 길목에서 떨고 있는 녀석을 맞이하게 되어 이름이 길목이다. 뚜치도 참 순한데, 이 녀석은 치와와답지 않게 유달리 순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그날 이후 사람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도 배운 걸까? 괜찮아, 길목아. 우리는 내 친구인 개박사 *병두같은 사람이 아니란다. 후루룹.


꺼칠이님이 갖고 있는 홍차들. 탐난다. 얼쑤.


꺼칠이님이 만들어준 아이스티

홍차를 참 연하게 마시는 내게는 좀 진하지만 시원하고 깔끔한 꺼칠이님의 아이스티를 마시니 슬슬 배가 고팠다. 구경하느라 배고픈 걸 느끼지 못하다가 차가운 아이스티 한 잔에 위장이 잠에서 깨어난 거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아귀찜


...과 잎새주. 이 소주는 이곳에만 있는 건가?

전라도 사람들은 뭐든지 고추장 혹은 초고추장에 찍어먹는다고 꺼칠이님이 말했다. 회는 물론 이런 찜도, 심지어 순대도 고추장에 찍어먹는다고 했다. 신기했다. 신기해하던 마님이 충청도에서는 생(生)굴을 간장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오오~~ 다들 신기해한다. 음. 나도 뭔가 말하고 싶었다. 안절부절. 샐러드 먹을 때 드레싱 안 하고 생채소 그대로 먹는다고 해볼까? 별로 놀라지 않겠지? orz


정말 전라도에서 고추장은 그렇게 많은 훌륭한 역할을 하는 걸까?

원래 일요일 밤에 서울로 돌아오려 했던 나는 하루 더 자고 월요일에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여러 액자를 배치한 술집 벽

이런 분위기의 술집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광주에 온 뒤로 여러 재미난 이야기와 일이 오갔지만, 이 술집에서 보낸 짧은 몇 시간이 더욱 재밌는 일과 이야기가 많았다. 몽실이님의 시트콤 같은 일은 그 중에서도 최고. 어떤 일인지는 몽실이님의 명예를 위해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정 궁금하다면, 광주에 가서 몽실이님에게 재현해달라고 하시라. (뿡! 들었어요?)

꺼칠이님은 술에 강하다고 한다. 남들 한잔 마실 때 두 잔씩 마셔도 상대방이 쓰러질지언정 자신은 멀쩡하단다. 아무래도 농부는 농사지을 때 매일같이 소주나 막걸이를 마셔서 그런가 보다. 나는 여전히 술을 잘 즐길 줄 모르기 때문에 물 마시듯 마시는 경향이 강한데 그나마 요즘에는 많이 마시지도 못한다. 다행히 몽실이님과 마님은 술을 못하고, 꺼칠이님은 워낙 술에 세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하지 않아 나는 내 술 먹는 방식대로 천천히 마셨다.

MSN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된 지 3년이 되었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여러 기술을 공유했다. 좋은 음악을 함께 즐겼다.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3년 동안 친구처럼 지냈고, 2005년 6월 5일에 이르러서야 서로 처음 만났다. 3년간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과 즐겁게 허물없이 나눴던 대화의 깊이만큼 실제 만났을 때의 서먹함은 한잔의 맥주로 허물어졌다.

술자리를 파하고, 모텔처럼 생긴 노래방에 갔다. 또 다시 시작된 변성기로 인해 노래방 기계의 그럴듯한 목소리 변조가 아니면 참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나, 베이스를 연상케 하는 낮은 목소리의 꺼칠이님, 가요도 동요 부르는 아이처럼 부르는 마님과 예쁘게 노래 부르시는 몽실이님. 다들 나름대로 망가지는 성의를 보였다. 카카.

광주에서 보낼 이번 연휴의 마지막 밤은 몽실이님 댁에서 보냈다. 돈이 거의 떨어져 가던 우리는 실례가 될까 싶어 약간의 부담이 들었지만... 넙죽 들어가 누웠다. 그때 마님이 비명을 지르며 광속으로 멀리 튕겨져나갔다. 천장에 아주 거대한 벌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음... 저 놈은 설마... 얼마 전에 내 방에 출몰했던 그 벌레의 친구?! 평소엔 이 정도 크기의 벌레가 없었다는 몽실이님의 증언을 들으니 괜히 찔렸다. orz

아아. 길다, 길어. 다음 장에서 계속!


이런 주막 분위기의 밥집이었다.

광주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현충일을 기리는 마음으로 근처 콩나물 국밥집에 갔다. 시장 국밥처럼 소박한 콩나물 국밥으로 늦은 아침 식사. 서울에 있는 콩나물 국밥집에서 먹던 콩나물 국밥은 지나치게 수식을 많이 하여 부담스러웠지만, 이 콩나물 국밥은 북엇국에 밥 말아먹듯이 편안한 맛이었다.

전남대는 바로 근처에 있었다. 입가심으로 전남대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넓은 전남대를 눈으로 휘둘러봤다. 어딘지 명확히 짚어내진 못하지만 전남대는 대학교보다는 넓은 공원 느낌이었다. 학생들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걸까? 하지만, 학교 분위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대학 공부를 주고받는 대학교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삶과 학문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듯하다.


다정하게 담배를 피우며 많은 사연이 있을 듯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꺼칠이님과 몽실이님. (사실 두 분은 흡연자가 아니다)


호수에 핀 연꽃. 3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인가?! 하며 머릿속에서만 호들갑을 떨었다.


호수에서 물고기라도 발견했니?

아직은 더워지지 않은 공기. 아침 10시경의 기후는 선선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다. 3년 만에 이뤄진 만남. 가겠노라고 약속하고선 당일, 혹은 전날 약속을 취소하기를 여러 차례. 양치기 소년이라며 구박하던 꺼칠이님과 몽실이님의 모습이 차 뒷거울에서 서서히 작아지고 있다. 구수한 전라도 말과 전라도식 말장난, 그리고 구수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안녕, 광주.

서울을 향한 힘겨운 귀행길

꺼칠이님이 설명하신 대로 우리는 고속도로를 탔다. 약간 헤매긴 했지만 어찌 저찌 방향 감각을 발휘하여 고속도로를 타긴 했지만, 어쨌건 표지판에 서울로 향하는 안내를 볼 수 있었다. 후훗. 길 잘못 들었다고 구박하던 마님은 금방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아내자 곧 내 방향 감각을 찬양했다.

우리가 달리는 이 고속도로는 대체 뭘까?
...라고 좌절스런 질문을 던진 건 대전 부근에서 달리고 있을 때였다. 깔끔한 고속도로와 그다지 막히지 않은 길, 그리고 처음 보는 휴게소와 표지판에 나와있는 분기점 지역 이름들을 보고 서해안 고속도로인 줄 알았는데 대전 부근부터는 알 수 없는 지역이었다. 황급히 다른 차들의 번호판을 봤다. 서울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와 마님은 귀신에 홀린 것 아니냐며 덜덜덜 떨었다.


대체 여긴 어디야! orz

어찌 저찌 (남)서울 톨게이트에 12,000원 가량을 지불하고 마침내 오후 3시 30분경쯤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님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양방언 공연 표를 우리에게 주신다면서. 행사에 당첨되어 양방언 공연 표를 받게 되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가게 되어 내게 주신다는 거였다. 우호호.


왼쪽은 내가 먹은 요리, 오른쪽은 마님이 먹은 요리

뽀님에게 표를 받은 뒤 잠실에 있는 칠리스에서 때늦은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곧장 세종 문화 회관으로 향했다.


짠, 증거 사진.

이번 공연은 2004년도 방송 무슨 시상 행사에서 대상을 수상한 KBS 다큐멘터리, 도자기에 실린 음악들(O.S.T)을 위주로 한 공연이었다. 어쩐지 모르는 곡들이 많다 싶었다. 대중에게 아주 잘 알려진 Prince of Jeju도 나왔고, 공연 정규 과정의 마무리는 Frontier!로 맺었다. 타악의 보배, 장재효님과 함께 신명나는 Frontier! 연주는 원곡 Frontier! 를 뛰어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Free as the wind는 연주하지 않아 아쉬웠지만, 다른 곡들도 훌륭하므로 아쉬움을 뒤로할 수 있었다. 여행 중 쌓인 피로를 양방언 공연으로 깔끔하게 날려보내는데 큰 도움을 주신 뽀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글을 마치며

스타워즈 연재물을 다 보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결국 스타워즈 장면 하나 보지 못하고 마쳤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왜 여행했어?"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목적에서 벗어나는 여행도 충분히 즐겁다는 걸 경험하였다. 비록 광주, 혹은 전라도 토속 음식을 맛보진 못했지만, 광주 하면 떠오르는 담양 대나무와 무등산도 경험했고, 서울에 온 뒤 노곤해진 몸은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으로 씻어낼 수 있었다. 이런 여행을 언제 또 할 수 있으랴.

이번 여행에 많은 친절과 도움을 주신 몽실이님, 꺼칠이님, 성여비님, 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와 함께 여행을 가느라 몸도 많이 상하고 고생한 마님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여행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