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기

기대하던 사람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요근래 기대했던 몇 몇 사람에게 실망을 했다. 기대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 그대로를 보겠노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작 무의식 중에 기대를 하고 있었나보다.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런 감정은 꼭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사람을 만나면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멋진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 확인 자체가 기대이고 만일 확인 과정에서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기대만큼 실망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무의식 중에 콕콕 찔러보긴 하지만, 누군가 날 콕콕 찔러보는 행동을 지켜보며 느끼는 불편한 마음 때문에 상대 배려 차원에서 최대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찔러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번에 실망한 이유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려고 찔러봤다가 영 아니다 판단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 반대 이유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려고 날 쿡쿡 찌르는 작업을 빤히 봤다. 내가 눈치 빠르거나 그런 심리전에 강해서 빤히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둔한 내가 뻔히 3자가 쳐다보듯 볼 수 있을만큼 그 사람들이 어리숙했다.

이럴 때 보통 나는 슬쩍 피해서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반격을 해서 귀찮은 입질을 차단한다.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는데 내가 잘 모르거나 혹은 내가 미처 생각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입을 다물고 멍청이 취급하게 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멍청한 모습을 보여서 관계를 끝내게끔 하기 보다는 수준 낮은 생각이나마 진심을 말해서 어떤 형태로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 사람 중 한 사람은 그 대화 이후 눈에 띄게 내게 실망한 기색을 비추며 날 피한다. 얘기에 앞서 내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고 정립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 밝혔는데도 그런 반응을 보이니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며, 섣부르게 정리 안된 생각을, 하지만 가식이나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인 생각을 말하며 인연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내게 잘못이 있다면 있다. 아마 앞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긴 힘들 것 같다. 내가 그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 생각 영역에 안정감을 취할 때까지는 그 사람이 나를 거부할 것이고, 안정감을 취한 뒤에는 내가 그 사람이 보이는 진실을 더이상 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자신과 내 생각이 일치한 줄 알았는데 깊은 부분은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자 곧바로 얼굴 표정을 바꿨다. 불행히도 내가 잡은 생각 형태는 나 나름대로 오래 생각하고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에 바로 동의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순순히 자신의 생각을 따라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순순히 따를 수 있는 부분과 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바람대로 내가 움직여주질 못하고 있다. 부딪히기 보다는 별 문제 없으면 다른 사람 생각에 따라주며 지내는 요즘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정돈한 생각 덩어리를 대뜸 바꿀 순 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생각으로 이끌려는 마음을 알고 나 역시 굳이 부딪혀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은 요즘이라서 되도록 그 사람의 생각에 맞춰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에 맞춰 '내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는 마음'과 그 사람의 생각에 맞춰 '내 생각을 고치기 위해 고민하는 마음'은 구별을 해야 한다. 나는 그 사람의 생각과 목표에 내 생각 덩어리를 바꿀 의지가 있고 그러는 중이다. 다만, 어느 한 순간 대뜸 바꾸기엔 생각이 시간과 버무려져 덩어리 진 크기가 제법 크고 단단하다. 즉, 차근 차근 바꿔야 하고,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이렇게 고민하는 내 모습을 어떡해서든 그 사람 생각을 거부하고 내가 고집 피우기 위해서 작전 짜는 걸로 오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도 얄팍해서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나를 대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달라졌다.

이런 사람은 꽤 흔히 만날 수 있다. 대체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나쁜 마음가짐은 아닌데, 자칫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너무 존중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실수를 한다. 다른 사람은 생각이 없어서 그런 멍청한(?) 결과물을 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 달리 할 말은 없다. 괜히 자존심(?) 건드려서 일 복잡하게 만들기 보다는 그 사람이 바라는 대로(근데 이미 예전에 고민이 되었다가 어떤 이유로 취소한 이유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낫다.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 하나 하나는 내가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 미숙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즐기기 보다는 부딪혀 이겨내려 노력했거나 슬쩍 피해오며 살아온 대가이다. 이런 건 책을 보는 것만으로는 채우기 힘든 계발 영역이다.

그런 상황에 어울리기도 싫고, 그렇다고 어떤 사람한테 실망하기도 싫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심하고 멍청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