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던 퇴근길
06 Dec 2007출출하긴 한데 배가 고프질 않아서 저녁은 굶은 채 밤 10시 다 돼서 회사를 나섰다. 곳곳에서 눈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 머리 위에선 차마 눈이 되지 못해 흐느껴 우는 방울 방울이 흩날려 내 잠바를 적시고 있었다.
기분 참 싱숭 생숭하네.
마음 같아서는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되도록이면 노래보다는 다른나랏말 회화를 듣자는 다짐을 지키려 묵묵히 회화 mp3를 고르고 재생시켰다. 저쪽 어딘가에서 한 남자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지만, 워낙 술 취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골목인지라 가던 걸음을 이어 나갔다.
“야!!! 거기 서봐! 서보라니까!”
뒤를 흘깃보니 한 남자가 비틀거리고 있었고 그 양 옆으로 남자 둘이 말 없이 그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실랑이가 있었나보다. 얽히기 싫어 난 발을 빨리 놀렸다. 귀 안에선 조금이라도 더 자고픈 남자 직장인과 얼른 안일어나면 지각한다는 그의 아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귀 밖에선 남자 셋이 맞붙어 있었다.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잡고 날 휙 뒤돌려 세웠다. 처음엔 회사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야, 서보라니까”라는 익숙치 않은 말투와 술 냄새에서 귀찮은 상황에 얽혔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난 그 사람 팔을 뿌리치고 잰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뒤에서 내 뒤통수 머리카락을 잡고 나를 세우며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뿌리쳐지고 걸어가는 내 머리카락을 다시 잡히는 상황을 되풀이하더니 나중엔 주먹으로 날 치려 했다.
그때 난 이미 화가 나있었다. 잘했다고 누가 내 머리 쓰다듬는 것도 싫어하는데 하물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내 머리를 휘두르니 짜증이 일었다. 그래도 술 취한 사람과 잘못 얽히기 싫어서 뿌리치고 도망가려 했고, 이 사람은 계속해서 내게 시비를 걸었다. 결국 참다 못해서 날 밀며 들이대는 사람을 받아들이듯 당기다 한 바퀴 휘돌려 바닥에 내던졌다. 내 힘은 싣지도 않고 순전히 그 사람 힘을 이용했을 뿐인데도 자신의 발에 걸려 철퍼덕 엎어지는 걸 보니 심하게 취한 사람이었다. 난 더 얽히기 싫어 후다닥 뛰어 도망쳤다. 뒤에선 고래 고래 소리치며 날 불렀지만 이미 다리가 풀린 상황에서 날 쫓아올 리 만무했다.
머리카락이 밝은 노란색이다보니 눈에 잘 띄어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서 지하철에 들어갔다. 몸을 추스려보니 오른손등이 긁혀 자국이 나있었고, 체스터님에게 중고로 샀던 ipod nano 4gb는 잠바 주머니에 없었다. 뒷머리카락을 잡힌 채 휘둘려서 뒤통수 머리바닥이 얼얼하고 목도 뻐근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는데 오늘따라 지하철엔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힘겹게 6정거장을 거쳐 내린 뒤 버스를 타려는데 한 개념 없는 여자가 3단 접이 우산을 다리쪽으로 향하지 않고 가슴 높이까지 든 채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려고 비비는 통에 내 왼팔이 다 젖었다. 젖은 우산에 다리가 젖은 적은 몇 번 있지만, 젖은 우산을 높이 들어서 팔이 젖기는 처음이었다.
버스 역시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뒤에 서있는 여자는 작정하고 내게 기대고 있었다. 하도 내게 기댄 채 버티고 있어서 나중엔 등이 다 아팠다. 화가 더 나면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버럭 낼 것 같아 그러려니 하며 힘겹게 목적지까지 왔다.
이래 저래 스트레스를 받아 단 먹거리를 사오려 했는데 그 마저도 깜박했다. 하루 내내 딱히 일이 꼬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다만 퇴근길이 문제였다. 오늘 밤은 대체 왜 이렇게 재수가 없던걸까.
화가 몹시 많이 났지만, 화가 난 날 걱정하며 다독여주고 걱정해주는 내 고마운 임을 보며, 그리고 이렇게 글에 투덜대고 한탄하며 마음을 거진 잡았다.
참으로 재수 없던 퇴근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