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다, 딱딱하다.
23 Feb 2007며칠 전, 자주 가지만 댓글이나 글 참여는 잘 하지 않는 동호회에 댓글 하나를 남겼다. 내가 남긴 댓글을 읽다보니 말투가 참 딱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도와는 달리 공격성을 느낄 것 같아서 댓글 끝에다가 그림말(emoticon)을 달았다. :) 이렇게. 다시 보건데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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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다.
딱딱한 말투. 문득 '딱딱하다'를 '단단하다'로 바꿔봤다. 단단한 말투. 분명 '단단하다'와 '딱딱하다'는 뜻이 거의 같은데 쓰임새는 묘하게 달랐다. 두 말은 '굳다, 쉽게 모양이 변하지 않는 상태'식으로 뜻을 띄고 있다. 하지만, '단단하다'는 이 말을 쓸 명확한 대상, 대체로 눈에 보이는 물질에 쓰는 반면, '딱딱하다'는 어떤 상태나 느낌에도 쓸 수 있다. '단단하다'도 '딱딱하다'처럼 어떤 상태나 느낌을 꾸밀 때 쓸 수 있지만, 거의 뚜렷한 어떤 것(물질 등)의 상태나 느낌을 꾸미는,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건 만지거나 볼 수 있는 뚜렷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이런 쓰임새를 감안하지 않고 뜻만으로 두 말을 쓰면 어색한 꼴이 되곤 한다.
어색함을 뒤로 하고 굳이 말에 담긴 느낌을 찾으면 말이 안될 것도 없다. 그런데 말 자체가 가진 미묘한 쓰임새나 느낌 차이 탓에 뜻도 서로 달라진다. 물질처럼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대상에 '딱딱하다'와 '단단하다'를 쓸 때는 둘 다 뜻차이도 적고, 쓰임새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에 쓸 경우 '딱딱하다'와 '단단하다' 말에 담긴 느낌이 가리키거나 꾸미는 느낌은 좀 다르다. '딱딱하다'는 마치 내용물이 굳어서 그 성질 자체에 변화를 주는 것 같고, '단단하다'는 내용물이건 껍데기건 그 자체를 굳히는 것으로 끝내는 것 같다. '딱딱한 무엇'은 '딱딱해서 이러한 것이 저러하다'라며 마치 굴절시키는 느낌이라면, '단단한 무엇'은 '단단해서 이런 것이 더 이러하다'라며 부추기는 느낌이다.
예를 살펴 보자.
- 딱딱한 사과, 단단한 사과
사과가 옹골차고 굳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딱딱하다는 겉을, 단단하다는 겉과 속 모두를 나타내는 차이가 느껴질 수는 있지만 사과라는 뚜렷한 대상 자체를 꾸며주고 있고, 그 물질 자체가 굳다는 같은 뜻과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
- 딱딱한 말투, 단단한 말투
'딱딱한 말투'는 말투를 굳혀서 부드러운 느낌을 뺀 느낌이다. 즉, 단순히 말투가 굳어서 힘이 실린 느낌이 아니라 굳다보니 그 성질이 변한(부드럽지 못함) 것이다. '말투'라는 대상 자체가 뚜렷한 꼴을 갖춘 대상이 아니다 보니 '단단한 말투'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아 어색하긴 하지만, 말에 담긴 느낌은 전달된다. '말투'에 담긴 성질을 다른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기 보다는 말투를 더 굳게 하고 힘을 싣는, 그러니까 강하게 말하는 느낌을 지니고 있다.
- 딱딱한 눈길, 단단한 눈길
말투와 마찬가지로 '눈길' 역시 사과처럼 물질이 아닌 어떤 상태나 느낌이다. 그래서 '딱딱한 눈길'과 '단단한 눈길'은 뜻이나 쓰임새가 다르다. '딱딱한 눈길'은 바라보고 있는 상태이되 마음 씀씀이를 적게 하거나 차갑게 하고 있는, 즉 바라보고 있는 행위 자체 성질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나 '단단한 눈길'은 눈길에 힘을 실었거나 굳게 바라보는 느낌이지, 눈길에 힘을 줘서 바라보는 의도나 생각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지 않다.
- 딱딱한 움직임, 단단한 움직임
'단단한 움직임'은 움직임이 더 강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움직임을 취하는 무엇이 단단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듯 하다. '딱딱한 움직임'은 굳어서 효율이 떨어지거나 다소 어색하게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강하거나 굳은 느낌과는 다른 멍청함이나 어색함, 어리숙함 등 새로운 성질로 변한다.
'딱딱한 무엇'과 '단단한 무엇'을 반대말로 만들어 보면 좀 더 뚜렷하게 느낌을 알 수 있다. '딱딱한 무엇(실체가 없는 대상)'은 '딱딱한 물체/실체의 성질'을 가지고 반대되는 성질만을 찾아 반대말을 만들지 않는다. 그런 성질을 이미 포함해서 다른 성질, 즉 '딱딱하다'가 가진 '굴절하듯 성질이 변함'의 반대 느낌도 가지고 있다.
딱딱한 사과/단단한 사과의 반대말은 무른 사과, 부드러운 사과로 공통되게 쓸 수 있지만, 딱딱한 말투의 반대말은 '무른 말투'이기도 하지만 '따뜻한 말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딱딱한 말투'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가움'(딱딱해서 '차가움'이라는 새로운 성질이 생겨나 원래 말 성질이 변했다)의 반대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단단한 말투'의 반대말은 '무른 말투'나 '힘을 뺀 말투'식으로 단단함이나 굳음이 가진 성질을 줄여주는 느낌이다. '단단한 말투'는 따뜻하건 차갑건 성질 자체를 새로운 성질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성질을 유지하되 더 강하게 혹은 부추기기 때문이다.
비슷한 말을 찾아봐도 두 낱말이 가진 다름을 알 수 있다. '단단한 무엇', 그러니까 '단단한 말투'나 '단단한 성격'처럼 그 꼴이 명확하게 볼 수 없거나 만질 수 없는 물질을 단단하게 한 말과 비슷한 말은 역시 '단단함'이 가지고 있는 뜻과 비슷한 뜻을 가진 말들이다. '단단한 말투'를 '힘이 실린 말투', '주관이 뚜렷한 말투'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처럼. '딱딱한 무엇'은 '딱딱해서 새롭게 덧붙여지거나 새로이 변한 느낌'과 비슷한 말도 가지고 있다. '딱딱한 말투'가 나온 이유에 따라서 '차가운 말투', '서먹한 말투', '살갑지 않은 말투', '거리감 있는 말투'식으로 '단단하거나 굳다'는 물질 성질과 관련 없는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렇듯 물질처럼 뚜렷한 꼴을 갖추고 있는 대상에 '딱딱하다'나 '단단하다'를 쓰면 거의 비슷한 뜻이나 쓰임새를 갖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느낌, 분위기, 움직임, 감정 등)에 쓸 때는 뜻과 쓰임새가 달라진다. 이런 다름은 말에 담긴 냄새나 맛, 즉 말이 풍기는 느낌을 느껴야 구분해서 쓸 수 있다. 다른 나라 말로, 혹은 다른 나라 말을 번역하듯이 뜻풀이를 하면 이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우리말을 모르는 사람)에겐 '딱딱한 말투'나 '단단한 말투' 모두 같은 뜻과 쓰임새를 가진 말로 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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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내용에 대해 한 삼십 분 가량 골똘히 생각을 하고 나니 영어에 자신감을 키워 나가던 생각이 흔들렸다. 아아, 이런 건 욕심인가?
아무튼, 말투에서 딱딱함은 좀 더 약하게 하되 단단함은 더 강하게 해야겠다. 겉은 부드러우나 속은 단단한, 옹골 찬 사람을 시늉이라도 내야 그런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