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에 취한 복분자 술

한밤 중에 달콤하고 시원한 걸 마시고 싶어 냉장고를 열었더니 고등어...는 아니고 복분자 술이 눈에 들어 왔다. 작년 한가위를 앞두고 자주 가는 동호회에서 어떤 사람이 진행하는 공동 구매로 산 2리터 플라스틱 병에 든 술이다. 설탕도 안넣었고 물도 별로 안섞어서 고기집에서 사먹는 복분자 술보다 좀 더 쌉싸름하고 독하다. 알콜이 20도를 넘는다고 하니까.

난 술을 잘 못마신다. 소주 두 어 잔이 한계이고, 맥주도 500cc잔으로 한 두 잔이 한계이다. 작년 한가위 때 이 복분자 술을 수령하고 별 생각 없이 소주 잔으로 한 잔 홀짝 했다가 밤새 잠이 안와 고생할 정도로 술에 예민하다. 냉장고 문을 연 채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복분자 술병 옆에는 사이다가 있긴 했다. 비록 내가 탄산음료를 좋아하지 않긴 하지만, 청량감을 내는 데는 얼음을 넣은 맥주나 냉동실에 20분 넣어 둔 사이다, 콜라, 웰치스처럼 시원한 탄산이 좋긴 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소화제처럼 드시는 사이다에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긴장하는 손에 힘을 주어 복분자 술병을 집어 들었다.

킁킁.
냉장고 안에서 이등병처럼 각 잡고 혹은 말년병장처럼 제 멋대로 자리 잡고 냄새 스르르 풍기는 다른 먹거리와는 달리 일열횡대로 다른 마실거리와 줄 맞춰 서있는(마실거리는 언제나 정말로 서있다) 복분자 술은 냄새가 약했다. 입 안에서 한 바퀴 돌리면 복분자 냄새가 가득 나는데 어째서 병 속에서는 별 냄새가 안날까? 얘도 온도를 타는걸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두 모금을 들이켰다. 며칠 전 회식 자리에서 시켜 먹은 복분자 술보다 덜 달고 진했다. 씁쓸함과 달콤함은 키스 못한다며 구박 받곤 했던 내 혀가, 진한 알콜이 품을 수 있는 애매한 차가움은 목구멍이 느끼며 복분자 술을 꼴깍 꼴깍 넘겼다.

술을 즐길 줄 모른다. 술에 약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술을 잘 마실 때에도 술을 즐길 줄 몰랐다. 맛 없으면서 마시고 나면 얼굴과 품에서 안주 냄새까지 껴안고 땀구멍으로 냄새를 풍겨 나오는 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서 술을 즐기는 어떤 이는 나와 술 먹는 걸 싫어했다. 돈 아깝다고. 나는 정말이지 술이 온누리에 미치는 해악을 통감하며 내가 얼른 마셔 없애 버리려는 하마 같았다. 취하지도 않고 술맛도 모르면서 벌컥 벌컥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여느 물처럼 입구멍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 위와 장을 거쳐 오줌보에 잠시 기다렸다 오줌구멍으로 나갈 뿐, 맛도 모르고 취하지도 않으니 술을 즐길 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밥을 먹었으니 똥을 누는 생리 현상 대상일 뿐이었다.

방금 마신 복분자 술 두 모금에 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목구멍으로 술을 마셔 위와 장으로 흡수하는 생리 현상으로써가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던 술이 갑자기 위 입구에서 사라져 심장으로 파고 드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배에 차곡 차곡 쌓여 있는 위와 장이 아니라 가슴에 자리 잡은 심장이 술을 마셨다. 두근 두근. 이건가? 이게 술을 마시는 건가? 궁금증이 일었고, 술을 가슴으로 마셨는지 구분하기 위해 술을 즐길 줄 모르던 예전 경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아직도 긴가 민가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목구멍과 위가 이어진 부분에 새로운 길이 열려 심장으로 술을 보내주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질질 흘려 술이 목을 타고 가슴에 이르다가 옷에 스민 걸지도 모른다. 슬펐다. 뜨거운 해에 아이스크림을 빼앗기고 우는 아이의 슬픔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내가 술을 마셨는지 조차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이 무지함이 슬펐다. 언제나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나의 무지와 무식이었다.

기껏해야, 과실주엔 불순물이 많아 내일 아침에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예측 따위나 하고 자빠진 지금 상황에서 술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신다는 말을 쓰기엔 내 살갗은 갸날프다. 하긴, 현역보다 4주 훈련만 받은 산업기능요원이나 전문연구요원, 혹은 공익근무요원이 군대 체험으로 할 말이 더 많듯이, 날 귀찮게, 피곤하게 하는 물로 정의내려 왔던 내가 지금 복분자 술 두 모금에 이렇게 자판을 한참 두드리는 것도 내 나름대로 정당하다.

지금처럼 싱숭 생숭 물풍선 같은 마음일 때는 복분자 술 두 모금이 아니더라도 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셨노라는 꼴갑을 떨게 했을 것이다. 뜨거운 100도씨 물로 내린 160cc 정도 되는 모카 원두커피도 그랬을테고, 내가 좋아하는 얼그레이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홍차도 그랬을테지. 어쩌면 삼겹살 한 점을 들고 뚝뚝 떨어지는 기름을 보며 “너는 왜 이리 눈물을 흘리니, 그리 아프니”라며 주변 사람을 식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혹은 달콤한 그대 입술에서 (입 밖으로 덩어리 져 나오면 부담을 느낄) 촉촉한 침이나 코에서 슬쩍 느껴지는 따스한 숨에서 마음은 무너져 눈물 흘릴테지. 그 무엇이건 호수를 흔드는 돌맹이가 되어 물결을 일으켰을테지.

똑 맞아 떨어지게 복분자 술 몇 모금이 그 돌맹이 역할을 했고, 이렇게 깊은 밤에 몇 마디를 감히 해 볼 용기를 얻는다.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노라, 하지만 술을 취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