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아침 출근 풍경
04 Jul 20071. 생소하고 어색함
주로 출퇴근 시간이 좀 여유로운 조직에 다녔던 탓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씩씩하고 늠름하고 당당하게 지각을 했었다. 아침 10시쯤에 타는 대중 교통은 그래도 좀 여유로워서 덜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타는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은 생소하고 어색하다. 오늘 난 생소했고 어색했다.
2. 당신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거친 운전을 하는 버스 운전 기사와 그 버스 안에서 두 다리로 균형 잡고 두 손으로 우산 끈을 동여매 우산을 단속합니다. 아둥 바둥 우산을 단속하고 손잡이를 잡자 비로소 몸에 여유가 돌아 주위를 휘- 돌아봅니다. 1인용 의자에 앉아 휴대 전화기를 꺼내 단문 보내기(SMS)를 하고 있는 당신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당신이 앉은 의자엔 노란색 표시가 되어 있고,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왼쪽 벽면엔 노약자를 기호처럼 표현한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오른쪽엔 나이 들어 등이 살짝 굽은 할머니께서 두 팔과 손으로 힘겹게 의자 손잡이를 부둥켜 잡은 채 거친 버스 운전 기사가 이끄는 휘청 휘청 버스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고 계십니다.
당신은 다른 어르신께서 그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할 때에도 여전히 단문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그토록 집중해서 20분 내내 단문을 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당신은 아름답지 못했고, 나는 당신의 뒤통수가 꼴보기 싫어 뒤쪽에 공간이 생기자 마자 파헤치고 도망치듯 들어갔습니다.
3. 서늘한 비 오는 아침과 강한 버스 에어컨 바람
버스 뒤로 가고 얼마 뒤 내 앞에 자리가 생겼다. 버스 뒤쪽 좌석은 2인석이었고, 통로쪽에 앉아 있던 갸날픈 여성은 짧은 치마를 신경쓰며 엉덩이를 끌듯 창쪽 자리로 들어가줬다. 무거운 노트북 덕에 내 등가방은 7kg에 육박했고, 주변에 딱히 앉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지라 나는 부담없이 그 여성이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비가 오는 날에 버스는 평소보다 에어컨 바람을 세게 트는 편이다. 아마도 김 서림을 막으려고 그럴 것이다. 이런 날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으면 당연히 춥다. 내 옆에 앉은 갸날픈 여성도 추운지 몸을 살짝 움크리고 손으로 팔을 자주 쓸었다.
내가 탄 버스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구멍이 창쪽 천장에 나있는데 이용자가 따로 바람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말 그대로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쪽에 앉은 사람은 좋건 싫건 에어컨 바람에 머리와 어깨를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바람 방향을 제어하거나 구멍을 막는 플라스틱 장치는 얼마 안할 것이다. 그 간단한 장치가 없어 비 오는 아침에 얇은 옷을 입은 갸날픈 여성 한 명을 비롯해서 창쪽에 앉은 몇 몇 사람들은 몸을 움크린다.
정말이지 훌륭한 편의성(Interface)이다.
4. 젖은 우산과 부비 부비
한 20여분을 버스로 이동하고 지하철로 갈아탔다. 아침 9시 20분경 2호선 잠실역은 무척 붐볐다. 나는 다시 우산을 끈으로 조이며 힘겹게 열차 안에 탔다.
잠시 후, 내 왼쪽 종아리가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하고 내려다보니 끈으로 조여지지 않아 밑둥 지름 40~50cm인 원뿔 모양으로 펼쳐진 3단 접이 우산이 내 다리에 닿아 있었다. 단 10초면 우산 끈으로 조일 수 있었을텐데, 그걸 하지 않아 내 왼쪽 종아리와 내 옆사람 오른쪽 종아리를 적시고 있었다.
우산 주인 겉모습은 예뻤고 우산 겉모습도 예뻤지만, 우산과 우산 주인은 미웠다.
5. 젖가슴과 부비 부비
왼쪽 종아리가 젖어 찝찝해하는 동안, 오른쪽 팔은 풍부한 가슴을 매단 여성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열차 안이 꽉찬 탓에 그 여성과 나 사이는 매우 가까웠고, 풍부한 가슴은 자꾸 내 오른팔에 닿았다. 난 이리 저리 뒤척이며 피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 앞에 선 여성이 날 째려볼 뿐이었다. 내 오른팔이 그 사람 엉덩이를 건드렸던고로. 결국 체념하고 어깨를 으쓱하듯 팔을 최대한 몸으로 당겨 차렷 자세로 그 가슴에게서 떨어지기로 했다.
모르는 사람 손길이나 몸이 가슴이나 엉덩이 등에 닿는 걸 좋아하는 여성이 어딨으랴. 마찬가지로 모르는 여자 엉덩이나 가슴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닿으면 남자인 나 역시 불쾌하다. 그러니...
제발 그 표정 좀 거두세요. 저도 불쾌해요. 게다가 전 작은 가슴을 좋아해요. (아, 이건 상관 없는건가?)
6. 못돼처먹었다
내가 서있는 쪽이 다른 쪽보다 유독 붐볐다. 그래서 나는 잠실에서 탄 이후로 선릉을 지금 막 지난 지금도 왼쪽 종아리엔 우산이(이젠 물기를 다 닦았는지 왠지 뽀송 뽀송해보인다), 오른팔엔 무섭게 덩치 큰 젖가슴이 덤벼드는 걸 피하느라 바빴다.
내가 서있는 쪽이 유독 붐빈 이유는 커다란 안내견을 데리고 탄 시각장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는 순했지만 나처럼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황급히 다른 쪽으로 피해갔고, 신경 쓰이는지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피하듯 서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건 보호막이라도 쳐져있는 듯 그 시각장애인과 안내견 주변은 공간에 여유가 있었지만, 그 공간 여유만큼 인접한 사람들은 구멍 하나 없이 빡빡하게 채워진 테트리스 조각 마냥 비좁게 서있었다. 나 역시 혹시라도 열차 흔들림에 균형을 잃어 오른쪽 발이 주책없이 그 커다란 개의 꼬리라도 밟아서 잡아먹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 계속 긴장했다. (그러니까 젖가슴 주인께서는 나 좀 그만 째려보시라. 나도 죽을 맛이니까)
그렇게 다들 비 오는 아침 출근 길을 힘겹게 겪고 있었다. 그때였다.
“비도 오고 사람도 많은 아침에 개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지랄이야. 택시 탈 것이지”
영어 회화를 듣느라 이어폰을 귀에 박아 넣은 내 귀에 또렷히 들린 말이었다. 그 말소리가 커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민망한 말 내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또렷히 귀에 들어왔다. 너무하다 싶었다. 어쩜 사람이 저런단 말인가. 가슴에 뜨거운 뭔가 움찔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 뭔가가 내 입에서 튀어나갔다.
“거참... 못돼처먹었네...”
헉...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가 공기를 울리며 흘러 다시 내 귀에 들어올 때까지도 난 내 혀가 어떤 말을 만들어 냈는지 정말 몰랐다. 말한 나도 놀라 입을 다물었고, 내 팔을 가슴으로 괴롭히던 여성과 우산으로 내 종아리를 괴롭히던 여성, 몰래 방귀를 뀌었지만 내 코에 행위를 발각 당한 어떤 엉덩이, 그리고 못돼처먹은 주둥이 모두 당황한 듯 했다. 이어폰을 끼었기에 내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도 모르겠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나 때문인지, 아니면 목적지이기 때문인지 시각 장애인은 안내견을 앞세우고 역삼역에서 내렸다. 미안했다. 한 3분을 더 견뎌낸 뒤 나도 강남역에서 도망치듯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