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길게, 혹은 짧게 쓰는 방법

글을 길게 못쓴다는 한 처자가 내게 글을 어찌하면 원하는 길이로 늘려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장난스레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진지하길래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가르쳐줬다. 글에 담을 주제를 갈래에 따라 주욱 주욱 찢어 나가며 살을 붙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오늘 비류연 아가씨를 만났다”는 주제로 글을 길게 쓴다고 해보자. 누구를 만났다는 내용으로 긴 글을 쓰려면 만난 동안 있었던 일들을 우선 시간 순서대로 쪼개면 된다. 다음과 같이 쪼개보자.

  • 비류연 아가씨를 강남에서 만났다.
  • 점심 식사로 낙지덮밥과 돈까스를 먹었다.
  •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커피가게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 잠시 빈둥대다 영화를 봤다.
  • 저녁은 삼겹살을 먹었다. 매화수도 곁들였다.

대체로 긴 글을 쓰지 못하고 막막해하는 사람들은 딱 이 정도로 내용을 쪼개고 그친다. 이런 구성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초등학생 방학 일기장을 보면 반갑게 만날 수 있다. 더 길게 쓰고 싶다면 위 단계를 더 쪼개야 한다.

  • 비류연 아가씨를 강남에서 만났다.
    • 왜 만났는가? => 데이트. 아가씨가 모처럼 서울에 날 보러 왔다. 아싸, 신난다!
    • 언제 만났는가? => 점심 식사 약속인데 내가 30분 지각해서 아가씨가 토라쳤다. 언제나 스타크래프트가 문제.
    • 왜 강남인가? => 오늘은 일하는 토요일이라서 아가씨가 날 배려하느라 강남역 부근으로 왔다.
  • 점심 식사로 낙지덮밥과 돈까스를 먹었다.
    • 맛은 어땠는가? => 낙지덮밥은 라면 스프 맛이 강했고, 돈까스는 두꺼운 종이 상자 씹는 느낌.
      1. 자취할 때 반찬하기 귀찮으면 남아서 찬장에 모셔둔 라면 스프로 볶음밥을 해먹곤 했다. 모양새는 별로지만 먹을 만 했다.
      2. 라면 스프는 자취생의 벗이다. 찌개나 국을 끓이다 간을 잘못봐서 실패하면 부담없이 라면 스프 반 개를 넣자. 미역국, 된장국, 김치국 가리지 않고 맛이 다 똑같긴 하지만 먹을만 하다.
    • 왜 그곳으로 갔지? => 더워서 멀리 거닐 엄두를 못내고 아가씨가 날 기다리던 그곳에 있던 분식집을 택했다.
    • 밥 먹으며 무슨 일이 있었나? => 30분 넘게 땡볕에서 기다려서 기분이 상했는데 밥까지 맛없어서 아가씨가 단단히 화가 났다.
      1. 아가씨는 화가 나면 입을 꾸욱 다문다.
      2. 말투도 차가워진다.
      3. 눈이 마주치면 한심하다는 듯이 눈길을 거두곤 한다.
      4. 이에 대한 나의 대처법? 우선 좀 달랜 뒤 아가씨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 위 내용과 실제 인물은 서로 직접 관련 없음! (화난 상황을 만들기 위한 허구 설정)※</li> </ul> </li> </ul>

      이런 식이다. 이제 위 두 단락을 합쳐서 글로 풀어보자.

      오늘은 일하는 토요일. 하지만, 대구에서 아가씨가 날 보러 서울에 왔다. 오늘도 일을 하기에 아가씨가 강남역 부근까지 오기로 했다. 날도 더운데 이런 배려를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보통 일하는 토요일엔 오후 3시에 퇴근한다. 하지만 이 시간은 너무 늦다 싶어서,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점심 식사를 하지 않고 2시간 일찍 퇴근하기로 미리 얘기를 해놨기에 나는 오후 1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퇴근 직전 한 판만 하기로 하고 실행한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20분이나 늦었다. 허겁지겁 뛰어갔을 때 이미 약속 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났고 아가씨는 땀범벅이 되어 토라져 있었다.

      아가씨는 말이 없었다.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입을 꾸욱 다물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는 얼굴. 말을 걸면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는데 그 말투가 차갑다. 눈이 마주치면 한심하다는 듯이 눈길을 거두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냉랭하기 그지 없다. 지금 아가씨가 그러하다. 큰일났다. 나는 잘못을 시인하고 아가씨를 달래며 아가씨가 서있던 곳에 있는 분식집으로 얼른 들어갔다.

      아가씨는 화를 삭히려는 듯 매콤한 낙지 덮밥을 시켰고, 난 먹거리 고르기 귀찮아서 아가씨가 고른 것 바로 위에 것을 골랐다. 종업원이 갖다 준 내 음식은 돈까스였다. 배도 고팠겠지만 내게 시위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는지 아가씨는 밥을 두둑히 떠서 입 안에 밀어 넣으며 열심히 먹었다. 아니, 밥을 잡아 먹었다. 난 마음이 작아지는 걸 느끼며 돈까스 조각을 입에 넣어 씹었다. 음... 택배 보낼 때 주로 쓰는 상자를 두 겹으로 겹친 뒤 밀가루 옷을 입혀 튀겨도 이것보단 맛있을 것이다. 두꺼운 종이 상자, 아니 돈까스에 담긴 심오한 우주 생물 요리 같은 맛을 대충 씹고 삼키는 와중에도 아가씨는 열심히 밥을 잡아 먹고 있었다. 대체 저건 얼마나 맛있을까 싶어서 한 숟가락 슬쩍 먹어봤는데 라면 스프 볶음밥 느낌이었다.

      아니, 라면 스프 볶음밥한테 모욕을 줬다. 너를 지켜주지 못하고 모욕을 줘서 미안해, 라면 스프야.
      라면 스프는 정말 훌륭한 조미료다. 남은 반찬도 마땅찮고 간장에 밥 비벼먹는 것도 지겨울 때, 라면 스프를 이용해서 밥을 볶아 먹으면 꽤 먹을만 하다. 그날 그날 몸 상태에 따라서는 낚지 덮밥 맛이 나거나 김치 볶음밥 맛이 나기도 한다. 닭갈비 다 먹고 밥 볶아 먹는 맛이 나기도 한다. 개인 취향이나 라면 스프 종류, 혹은 몸상태(감기에 걸리면 김치 볶음밥 맛이 나더라)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체로 먹을만 하다는 데는 큰 차이가 없다.
      또, 국이나 찌개를 끓이다 간을 잘못 맞춰서 망쳤을 때 라면 스프를 넣으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 거듭난다. 안좋은 점은, 미역국, 된장국, 김치국 등 건더기나 모양새는 다르지만 맛이 다 똑같다는 것인데 그 무서운 음식물 쓰레기통에 음식물을 더하지 않아 좋고, 1주일 동안 국 걱정하지 않아 좋다.

      이렇게 훌륭하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라면 스프인데, 방금 나는 감히 이 맛없는(그렇지만 아가씨에게 열심히 잡아먹히고 있는) 주황색 덮밥을 라면 스프 볶음밥에 비유했다. 찌그러진 내 미간만큼이나 아가씨 얼굴도 가히 명랑하진 않았다. 세상을 두루 해롭게 할 이 정체 모를 먹거리를 잡아먹으며 이 한 몸 희생하여 빛을 내리게 할 지어니, 이 어찌 빛나는 아가씨가 아니란 말인가! 비록 그 빛은 찬란한 가시광선이 아니라 나를 강렬하게 압박하는 자외선이었고, 나는 오존층을 필요로 하는 작은 생명체가 되어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벌써 상당한 양을 썼다. 혹시라도 글에 시덥잖은 잔재주라도 부리며 꾸밀 줄 안다면, 저기서 한 번 더 갈래별로 글을 쪼개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주제로 단편 소설을 쓸 수도 있다. 어렵지 않다. (물론, 글자 쓰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며, 재미는 별개이다.)

      자, 그럼 반대로 글을 짧게 쓰는 방법은 뭘까. 간단하다. 글을 덜 쪼개면 되며, 각 단락에 담겨 있는 소주제만 설명하고 나머지 내용은 과감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 위 예제에서 “아니, 라면 스프 볶음밥한테 모욕을 줬다.”는 단락은 다양한 쓰임새로 쓸 수 있다는 한 문장으로 줄이거나 아예 단락 자체를 빼버려도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나와 비류연 아가씨가 먹는 음식이 맛없다는 것이며, 라면 스프 얘기는 음식이 맛없다는 내용을 좀 더 재미나게 꾸며주는 장치일 뿐이다. 라면 스프 얘기가 없으면 글이 좀 심심해지기는 해도 내용 자체가 왜곡되진 않는다.

      ...

      글을 길게, 혹은 짧게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쓸 글이 뭔지를 먼저 파악하고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 필요에 따라 글 단락을 쪼개면 된다. 짧게 쓰고 싶다면 조금만 쪼개고, 길게 쓰고 싶다면 여러 번 쪼개면 된다. 이런 글쓰기 방법이 익숙치 않다면, 위와 같이 단락 별로 주제만 한 문장 정도로 쓰며 글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뼈대를 세운 뒤 살을 붙이면 된다. 이게 익숙해지면 머리 속에서 바로 이런 구성 정리가 된다.

      사실 글을 길게 쓰건 짧게 쓰건 별 의미 없다. 중요한 건 할 말을 제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 기호만으로 할 말을 다 담을 수 있기도 하고, 읽는 이의 긴장을 늦추기 위해 일부러 글을 길게 늘이기도 한다. 무작정 길게 쓴다고 능사가 아니며, 무작정 짧게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글이 길어도 하고 싶은 말을 글이나 단락 맨 앞에 쓰면서 자연스럽게 읽는 이를 이끌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글을 쓴 이유는, 그 단계에 앞서 자기 뜻대로 글을 길거나 짧게 쓰며 통제력을 갖출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