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하게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폭력이다.
29 Oct 20081. 어려운 말
한글을 만든 목적은 요즘 말로 간단히 말해서 정보를 널리 두루 공유하기 위함이다. 한글을 만들기 전엔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썼는데, 한자는 먹고 살기 바쁜 대다수 사람들이 익히기에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한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양반층이 정보 대부분을 독점하여 권력을 누렸다. 한글은 며칠이면 익혀서 소리를 글로 받아적을 수 있을만큼 쉬운 글자였기에 당시 양반층은 한글을 강하게 반대했고, 그 탓에 한글이 일으킬 수 있는 어마 어마한 가치는 오래도록 묻히고 만다.
한글을 쓰는 요즘은 어떨까. 한글 덕에 우리는 말을 아주 쉽고 빠르게 쓸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글로 담을 말은 참 어렵다. 우리말 자체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굳이 어렵게 쓰는 탓이 더 크다. 어려운 말에 너무 익숙해져서 쉬운 말을 쓰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지경이다. 몇 가지 살펴보자.
만약에 사람들이, 사실은 선적인 일관성이나 변증법적인 양극성이라는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억지로 관습적인 시뮬라시옹을 가지고 뒤틀어놓은 영역 안에서, 아무 사건의 사이클 전체를 예견해 본다면, 이 행위나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득을 주었고 모든 방향으로 바람 통하듯이 통해 버렸기 때문에 사이클의 끝에 와서는, 이 행위에 대한 모든 임의로운 한정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와 함께 모든 행위는 폐기되어 버린다.
책, 시뮬라시옹, 47쪽 중에서
저 한 문장은 지금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내 철학 개념이 얕은 탓도 있겠지만, 문장이 우리말과 매우 다른 꼴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저 책은 번역서이고 철학책이라서 작은 의역이 뜻을 크게 잘못 전달 할 수 있으니 저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떠한가.
인간의 영혼은, 그것이 자신 속의 동물적이고도 맹목적인 욕망을 이성적 사유와 분별의 힘에 의해 다스리고 지배할 때, 자신의 본래적 탁월함을 실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의 모든 부분 모든 기능은, 그것들이 모두 이성적 분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조정될 때, 자신의 본래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책, 나르시스의 꿈, 40쪽 중에서
번역서 같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다.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영어 번역투 문장에다 지나치게 대명사를 써서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이런 문장은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내용은 아니니 넘어간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떠한가.
범죄행위로 인한 사망ㆍ중장해 피해자가 가해자의 불명 또는 무자력인 관계로 범죄피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상받지 못하거나, 자기 또는 타인의 형사사건의 수사 또는 재판에 있어서 고소ㆍ고발 등 수사단서의 제공, 진술, 증언 또는 자료제출과 관련하여 피해자로 된 때 국가에서 피해자 또는 유족에게 일정한도의 구조금을 지급하는 제도
사이버 경찰청, 범죄피해자 구조제도 중에서
문장이 쉽지 않고 낱말도 어려워서 글로 봐도 얼른 이해가 안되는데, 만약 저런 설명을 경찰서나 파출소에서 말로 듣는다면 더 알아듣기 힘들 것이다. 이쯤되면 어려운 말은 폭력이라고 칭할 수 있다. 정보(지식)를 이용한 폭력 말이다. 그나마 법조계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말을 쉽게 쓰는 노력을 기울여 행정 소송 안내글 경우처럼 법 관련 정보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말 위주로 써서 제공하고 있다.
2. 쉬운 영어 쓰기 운동
영국에선 1979년부터 쉬운 영어 쓰기 운동(Plain English Campaign)을 벌이고 있다. 한 노인 부부가 사회보장제도인 난방비 신청 서류를 쓰지 못해 얼어죽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 공문서, 보험 및 금융, 법 관련 문서는 고약하다는 말이 나올만큼 어려운 표현이 가득해서 원성을 사고 있는데, 이런 문서에 있는 말을 일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바꾸는 운동이다. 예를 들면,
If there are any points on which you require explanation or further particulars we shall be glad to furnish such additional details as may be required by telephone.
만약 설명이나 세부사항에 대해 요구할 점이 있다면 전화를 통해 기꺼이 추가 세부사항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문장을
If you have any questions, please phone.
여쭤보실 게 있다면 전화 주세요.
이렇게 쉽게 바꾸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운동을 오랜 시간 해온 덕에 많은 이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이 운동에 동참하는 곳에는 크리스탈 표식을 달아주며 적극 장려하고 있다.
3. 어려운 말 쓰기에 굴복 당하고 휩쓸리기
어려운 말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예의 때문이다. 고맙다고 하면 예의 없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고 하는 식이다. 감사는 일본식 한자어인데, 고마움을 느낌이라는 뜻이다. 쉽지 않는 낱말인데 이제는 두루 쓰여서 쉬운 말이 되었고, 고맙다는 말보다 더 공손한 표현으로 쓰인다.
또 다른 이유는 효율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기득권이다. 우리말로 쓰기 어려운 표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상당 수는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대신 쓸 수 있다. 감자(減資)라는 말 대신 자본금 줄이기라고 써도 뜻을 전하는 데 문제가 없다. 감자라는 낱말을 쓰면 이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뜻을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진입 장벽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은 ~적이라는 표현으로 뜻을 불명확하게 나타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의적으로”는 “일부러”, “대체적으로”는 “대체로” 쓸 수 있다. 이런 말은 그래도 쉽고 명확한 편이다. “가시적 증명”나 “문제적 장면” 같은 표현은 말도 어렵고 뜻도 명확하게 와닿지 않는다. “문제적 장면”이라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문제라고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인지 얼른 알기 어렵다. “가시적 증명”도 눈에 보이는 증명인지, 증명 결과가 눈에 보일만큼 진행됐다는 것인지 쉽게 알기 어렵다. 이런 표현들은 말을 짧게 줄여주지만 뜻을 불명확하게 하여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말이 있는데도 다른나랏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다양한데 게으름이나 허영심 때문인 경우가 흔하다. 선이나 줄이라는 우리말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굳이 라인(line)이라고, 상자라고 써도 되는데 박스(box)라고, 전화기나 휴대전화기라는 말 대신 휴대폰이라고 말을 쓰는 것이다. 물론 다른나랏말이므로 우리말에 꼭 들어맞는 말로 쓰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가 아니라면 그 상황에 맞는 우리말을 쓰면 되는데, 라인, 박스, 폰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많이 쓰이고 있다. 흔히 쓰이는 다른나랏말이라서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4. 쉬운 말 쓰기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어떤 시트콤에 나온 장면이 기억난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할아버지가 툭하면 며느리나 손자가 알아들을 수 없게 일본말로 구시렁거린다. 며느리가 있는 자리에서 친구와 일본말로 흉을 보기도 한다. 극 특성상 우스운 상황으로 풀어냈지만, 말로 휘두르는 폭력성 때문에 보는 내내 불편했다.
이미 우리는 다른나랏말로 세대나 계층 사이에서 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에 이르렀다. 그뿐인가. 쉬운 말을 쓰면 알아들을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말을 써서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소통을 가로막고, 더 나아가 정보 공유를 방해하는 폭력이다. 어려운 말 쓰기라는 폭력은 작게는 소통 방해를 하고,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거나 두려움을 갖게 해 도망치게 한다. 때로는 어려운 말을 힘겨워 하는 이들을 죽이기도 한다. 말을 쉽게 쓰지 않는 이들과 어려운 말이 이 사회를 채우고, 이 사회는 그러한 말과 정보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정보 소외 계층으로 만든다.
아직 이 사회에서 떠다니는 어려운 말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말은 빠르게 어려워지고 있고, 그 빠르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순간부터 자신도 어려운 말이 휘두르는 폭력에 희생 당한다. 쉬운 말 쓰기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내 이웃, 사회를 지키는 것이다. 또, 정보를 빠르고 두루 공유할 수 있어 지금보다 더 큰 집단 지성을 이룰 수 있으며, 정보에 다가가는 것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
익숙하지 않거나 어려워도 쉬운 말을 쓰도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