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수주의자가 된 까닭
19 Oct 2008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는 수구주의자나 기득권자들이 온갖 허튼짓을 하는 탓에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깐깐한 어른들 사이에서 젊은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말을 하면 다소 구박을 받곤 한다. 게다가 실용주의자라는 말까지 하면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로 오인을 받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일부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한날당”이라고 부르는 탓에 내 필명인 “한날”로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실은 꽤 오래도록 진보주의자였고, 지금도 그런 성향을 꽤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갈수록 진보성보다는 보수성이 강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진보에 의문을 품고 있다. 진보에 의문을 품으며 서서히 보수 쪽으로 머리가 향하는 이유는 이러 저러한 것들을 보고 겪으며 머리를 채우고 이들이 어우러져 개똥철학이나마 갖춰진 데 있다.
모순되지 않은가? 앎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현 체제를 유지하려 애쓰는, 머리에 똥만 가득 찬 이들이 보수주의자들인데, 소신이나 철학이 생길수록 보수성이 짙어지니 말이다. 이는 기득권자나 자본가, 권력자들이 사회에 두루 뿌려 놓은 거짓말에 기만 당하고 사기를 당하기 때문에 모순되어 보이는 것뿐이다. 저들은 변화 빠르기나 폭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일 뿐이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느릴 뿐, 기득권 주장과는 별 관계없다.
물음 하나를 머리 속에 크게 써보자.
진보가 정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정치 영역에서 뜻하는 진보와 구분을 해야 한다. 여기서 진보란 사전에 나오는 뜻, 그러니까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이런 뜻이 있는 낱말을 뜻하며 정치 쪽에서 뜻하는 진보는 뒤에 차츰 나온다. 어쨌든 나는 사회 변화와 발전이 부담스러워서 도무지 정이 가질 않는다. 저 진보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확신도 들지 않는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은 해당 분야나 사회 측면에서 진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대다수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장담할 순 없다. 기계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일자리를 잃고 있다. 즉, 효율을 높이려고 대체로 느리고 불확실성을 가진 개체인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다. 발전이 불러온 효율이란 그런 것이다. 이러한 진보는 정치/사회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기술 진보주의자나 혁신자가 이끌어 내며, 이는 진보주의를 거부하는 자본가에 의해 경제계에 도입되고 극대화된다.
이 역시 사기극이며 말장난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좇는 진보란 단순히 기술 진보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발전과 변화를 통해 우리의 삶 자체가 진보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거나 늘려줄 경제 체계에 효율을 극대화하여 기술이나 사회 진보를 도구로 이용한다. 즉, 이러한 진보는 시작이나 의도와는 달리 그 운용이나 결과는 기득권 발전 장치로 쓰여 넝마가 되고 만다.
진보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삶의 진보로써 작동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 사회는 경제 활동을 우선시하고 있다. 단도직입 하자면 경제에 개개인의 삶, 그리고 그 삶이 모인 사회가 지배받고 있으며, 이렇게 편향된 사회 환경에서 진보 역시 삐뚤어지거나 특정 진보만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진보가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모순된 말이 허용되는 것이 현 사회이다.
돈이라는 경제 수단이 생긴 이래 경제 체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가치는 돈이라는 매개체로 대표되고 있다. 뜻을 가리키지만, 실제 그 뜻 자체를 품지 못하는 기호처럼, 실제 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그 실제 가치를 대표해서 현 경제 체계에서 거래되는 것은 돈이다. 대다수 사람이 누리는 삶의 가치는 경제 활동 개체(상품, 서비스 등)를 통해 얻는 2차 만족감에서 이뤄지며, 이러한 개체는 돈으로 대표된다. 아니, 대표성을 넘어서 돈으로 결정 지어진다.
결국, 진보도 경제에 통제되어 진보에 따른 참된 결과마저도 경제 수단으로 발이 묶이고 만다. 그 대가는 경제 효율 극대화라는 찬사와 함께 체제(system)는 진보하고, 그 체제를 이루는 부품들인 사람들은 더 나은 부품, 즉 진보의 결과물에 대체되어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대체로 IT 얘기를 많이 한 블로그이니 Open API를 예로 들어보자. Open API는 대단히 진보된 애플리케이션 통신 규약이다. 폐쇄에서 개방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힘이 약한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으며, 이용자들 역시 진보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API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어 플랫폼 소유자가 곧 API 역시 소유하는데, 이를 개방하여 누구나(?) 그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게 했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힘이 센 이들, 즉 기득권자나 독점자 관점에서 보면 느낌은 사뭇 다르다. 얼핏 보면 플랫폼 소유자가 많은 부분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손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큰 이득을 보는 것이다. 양에서 질로, 이제는 질을 넘어서 선점이 중요한 요즘 세상에 혼자서 그 무거운 플랫폼을 등에 업고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모하다. 질은 몰라도 양이나 속도에서는 폐쇄 플랫폼이 개방 플랫폼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플랫폼 소유자로서는 플랫폼을 Open API로 개방하는 것은 폐쇄형 플랫폼에서 낼 수 없는 효율을 내기 위한 진보이다.
해당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이나 단체에서 API 개발자로 일하던 이에겐 이런 변화가 재앙이 될 수 있다. 해당 분야나 산업군에선 분명히 높은 효율을 보장하는 진보이겠지만, 그러한 기술과 철학 진보가 그 일을 하던 개인에겐 불행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여가를 쪼개어 자신을 계발하여 변화라는 괴물을 피하여 살아남거나, 혹은 조직에서 나와 바깥에서 Open API를 활용한 자영업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같은 직무로 다른 기업이나 조직에 갈 수 있지만, 산업군에 휘몰아치는 변화라는 파도를 완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다.
굉장히 모순된 상황이다. 조직체는 그 성향상 보수성이 강한데, 진보 때문에 보수성이 어느 정도 보장하던 안정감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 털리듯 튕겨 나온 이들 중 상당수는 불안정 속에서 플랫폼 소유자와 경쟁한다.
물론, Open API가 단순히 효율을 높인 것은 아니며, 이전에 없던 기회와 가치를 개방하여 넓혔다는 점 역시 인정한다. 위 예는 진보가 기득권자나 자본가들에게 어떻게 무기화 되는지를 다소 편향된 관점에서 든 것일 뿐이다. 굉장히 진보성이 강한 오픈 소스 프로젝트(Open Source Project)들이 사람과 사회에 미친 좋은 진보를 인정하고 사랑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능력이 낼 수 있는 가치가 평가절하되거나 심지어 일자리를 잃는 힘 약한 다수를 외면하긴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진보는 진보로써 사람과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힘센 권력자에게 무기가 되는 흐름과 모습을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진보주의에 담긴 철학이 경제 가치를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을 더 따뜻하고 뜻깊게 할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데, 정작 현실에선 나를 현혹하고 기만하며 심지어 내 목까지 겨누는 도구나 수단이 되고 있다. 마치 TV나 언론 매체들이 내게 그러하듯 진보 역시 그렇게 악용되는 것이다.
처음 진보주의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졌다가 골수와 심장까지 얼려버리는 현실이라는 냉수 한 잔에 정신을 차렸다. 진보주의자는 진보를 철학과 행동,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기득권자나 자본가들은 진보를 무기로 쥐어 휘두르며 진보주의자 역시 그 무기에 위협을 받는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마저 무기처럼 대하여 진보는 더욱더 왜곡되어 사생아가 되거나 괴물이 되어 태어나 많은 사람을 괴롭힌다.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불편함은 기꺼이 감당하며, 만족을 한다면 굳이 지금보다 더 진보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즉 세상 흐름을 부담스러워 하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혹자는 패배주의자, 혹은 도망자라고 비난을 할지 모르지만, 난 아직 졌거나 도망친 적이 없다. 또한, 큰 변화나 빠른 변화를 부담스러워 할 뿐, 틀을 유지하며 더 나은 가치를 좇는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찾아 끊임없이 공부하고 궁리하여 나 자신을 무기가 된 진보로부터 지켜내려 한다. 이러한 사회와 이러한 결심으로 나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부르게 되었고,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