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계획
06 Mar 2008이 글을 빌어 고백을 하자면, 난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수 년째 고생 중이다. 삶이 어렵고 팍팍할 수록 증상이 도지는 고약한 병이며, 서점에 가면 관련 책들이 매우 많고 그런 책들이 아주 잘 팔리는 걸 보면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시달리고 있는 듯 싶다.
이 병이 고약한 이유 중 하나는 “어떤 날”을 기점으로 스멀 스멀 떠올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가 곧 현실이라는 차가운 벽을 느끼게 하고 의지 박약을 스스로 한탄하며 우울하게 만드는 점이다. 이 병에 자주 휘둘린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개가 똥을 참지”라는 비아냥을 들어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글 제목과 더불어 앞선 단락 두 개를 보면 이미 무슨 병인지 다들 눈치 챘겠지만 그래도 아직 감이 안온 이를 위해 친절해지자면, 담배 끊기, 살빼기(diet), 영어 공부하기, 운동하기를 흔한 예로 들 수 있는 병이다. 바로 계획병이다.
이 병은 실로 오래도록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것 같다. 존 하비-존스 경은 “계획을 세우지 않을 때 가장 좋은 것은 걱정과 압박의 기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완벽한 실패가 갑자기 닥쳐오게 된다”며 계획을 세우는 어려움과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가슴 찌르르 저리게 말했다. 토마스 칼라일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국 영락(零落)한다. 목적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사악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했는데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을 짜는 행위가 계획임을 생각하면 말 자체에 계획이 없었을 뿐, 계획의 중요성을 에둘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앓고 있는 기획병과 계획병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제법 다르다. 기획병이 사람을 나타내는 특질이 되지 못하고 증상이 되려면 실천력이나 능력을 조금만 갖추고 몽상만 크게 해야 한다. 비슷한 원리로 계획병이 증상으로 되려면 실천력이나 부지럼을 조금만 떨고 계획이 이뤄졌을 때 얻을 열매에 침을 많이 흘려야 한다. 계획을 다 짠 뒤 계획에 없던 일을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부터 계획대로 하자는 다짐을 하면 금상첨화.
하지만 현실은 냉정해서 금상첨화라는 표현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사실은 설상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디 이 뿐인가? 우리가 뭔가 계획을 하는 순간부터 그 계획을 깨뜨리려는 못된 음모들이 난무한다. 심지어 공기 마저 내 계획을 깨려는 것 같다.
내가 계획대로 산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청년이 됐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 비실한 몸으로 태어나 사회를 잠에서 깨우는 혁명가가 되었을테고, 88만원 세대에게 강한 자극을 주어 이들은 나를 따라 지금보다 개념을 가득 탑재한 청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편해 할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주물럭거리는 세력들. 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사회를 통제 하기 위해 내가 계획을 세워도 실천하지 못하게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방해하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실없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도 너무도 허무할 정도로 사소한 이유로 계획이 흔들리거나 깨지기 때문이다. 늘 계획하고 늘 지켜내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내 계획들아. 어째서 내가 계획 하는 일은 하나 같이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하루는 시간을 내어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실은... 고백하자면 그런 하루가 아마 365번은 넘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린 결론은 내 의지가 약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라 내렸다. 어떻게 고민을 해도 그랬다. 앉든 서든 눕든, 뭔가를 먹으며 하든 똥을 누며 하든, 여자 친구와 뽀뽀를 하며 고민을 하든 일을 하며 고민을 하든 아무 차이 없었다. 왜냐하면 실패한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자세나 상황만 바꾸며 고민 했으니까.
완벽함이란 더 이상 무엇인가를 더할 것이 없을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무엇인가를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 앙뜨완느 마리 로제 드 생떽쥐페리
그렇다. 맞다. 옳다. 참이다.
그런데 공감과 동감을 적극 하면서 정작 따르기 참 힘든 말이다. 내가 그간 계획을 이루지 못한 이유도 누군가 날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획에 뭔가를 자꾸 더하여 내가 짊어지고 움직일 수 없는 뚱땡이가 됐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무거워서 제대로 들지 못해 오래 함께 하지 못하였고, 누군가는 기를 쓰고 짊어지고 가다가 그만 깔려 다치거나 심지어 죽기도 한다. 사람 잡는 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좋은 계획. 그것은 완벽한 계획이다. 더 이상 뭔가를 뺄 것이 없을만큼 가볍고 명확하며 뚜렷한 계획이다. 그런 계획이 완벽한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 완벽한 것이다. 계획을 했고 그걸 계속해서 지켜내려면 강한 동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약한 동기만으로도 지켜내고 행할 수 있어야 완벽한 계획이다. 움크리고 앉은 채 계획을 잡고 끄응~! 힘을 주며 힘차게 일어나야 들 수 있는 것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다.
자, 이쯤되면 내 계획병을 바르게 진단하고 치료법도 찾은 듯 싶다. 이제 완벽한 계획을 짜는 데 필요한 기획을 하고, 그 기획에 필요한 계획을 짜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