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적어도 상대방만큼은 만족스럽게 느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그런 소통 만족감을 느끼려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변치 않는 점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고,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 당장은 소통이 잘 이뤄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상대방이 느끼는 소통 만족감은 떨어진다.

소통 만족감을 높이는 좋은 방법으로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라 했는데, 사람은 상대방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으로든 본능으로든 누구나 이기성을 발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불필요한 정보는 최대한 걸러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적합한 정보만 걸러내서 듣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람은 걸러낸 그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인지하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같은 사실이나 사물, 즉 같은 현실에 있는데도 개개인은 서로 다른 현실을 사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미 형성된 자신의 현실과 세계관을 깨뜨리기란 대단히 어렵다. 누군가 자신의 세계를 건드리면 자연스레 공격받는다고 느끼고는 움츠러들거나 반발하게 된다. 상대방이 소통 만족감을 느끼게 하려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이란 결국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할 말”로 착각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은 말 시작부터가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고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곧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이런 소통도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일 아주 낮은 가능성에 기대야 한다. 이런 불확실성에 내 신뢰를 거는 게 과연 합리성 있는 것일까?

사회는 소통이라는 연결 끈으로 구성된 거대한 그물이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도시, 즉 사회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소통 수단 중 하나인 눈이 막혔을 뿐 다른 소통은 가능했기 때문이며, 이 소통으로 새로운 사회 규칙을 만들어갔다. 이말인 즉, 소통에 능할수록 사회에서 잡을 기회가 늘고 이뤄낼 가능성도 크다. 이 소통은 “해야 할 말”인 척하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담아서 전달하면 된다. 이 말이 너무 단순해서 시시하게 느껴지지만, 이 시시할 정도로 단순한 걸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다수 사람은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할 말로 할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진실하다고 생각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본다는 말은 신뢰, 즉 믿음이 형성됐다는 것인데 이 신뢰는 소통에서 대부분 이뤄지며, 상대방의 가치관(세계, 현실)을 지켜주는 선에서 내 생각을 전달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이 내게 신뢰를 품게 된다. 즉,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하기 쉬운 데 반해 다루기는 퍽 까다롭다. 하기 쉬운 이유는 말 시작점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이유는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많이 쓰면 대체로 내 신뢰가 깎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서 꺼낼 말이 일어나고, 그 뒷수습도 자신이 다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 뒷이야기는 “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아주 흔한데, 다른 사람 뒷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신뢰를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하는 것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나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아니라 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당장 개운해지려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차츰 자신의 신뢰도는 떨어질 것이다.

“해야 할 말”은 하기 쉽지 않지만 다루기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덜 까다롭다. 시작이 쉽지 않은 건 상대방이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맞춰 해야 할 말을 하면 그 이후는 상대방이 뒷처리한다. 말은 자신이 했으되 일단 말 시작점을 상대방에게 놓는 데 성공하면 그 이후 운영은 상대방이 맡아서 사실상 상대방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해야 할 말만 간결하게 조금하고 나머지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상대방은 충분한 소통을 나누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내가 한 말까지도 상대방은 자신이 한 말처럼 포용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고 싶은 말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다듬어서 해야 할 말에 담아내면 상대방은 솔직함 마저 느끼게 된다.

그 누구도 없이 자신만 존재하는 사회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이가 서로 이어져있는 이 사회에서 산다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둔, 즉 시작점에 둔 소통이 아니라 상대방에 시작점을 둔 소통을 하는 것이 좋다. 심리 저항선(이를테면, 자존심으로 가장한 이기심)을 이겨내면, 상대방에 생각과 말의 시작점을 두고 소통을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제하고 해야 할 말을 주로 한다면, 내가 말을 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말을 하게 한다면(실은 해야 할 말만 하면 자연스레 내가 말하는 빈도는 줄고 상대방이 말하는 빈도는 는다), 우리의 소통은 더 만족스러워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