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도 기획병을 따르다
26 Feb 2009집들이를 하기로 마음 먹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하고선 처음으로 집들이를 했다. 집들이는 집을 사거나 전세를 얻고나서 하는 거라던데, 내 집은 보증금도 얼마 안 되는 월세이지만 좋은 분들 모셔서 모처럼 얼굴보며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려고 집들이를 한 것이다.
[caption id="" align="alignleft" width="75" caption="혼자 밥 먹지 마라"][/caption]
집들이를 하려고 마음만 먹고 있던 어느 날, “혼자 밥 먹지 마라”는 책을 읽었다.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인 책인데, 강한 자극을 받긴 했다.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며,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건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런 성격은 사회 생활 하는 데 불편한데, 내 본업이 기획이다보니 일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곤 한다.
원래 난 수줍음을 많이 타니 어쩔 수 없지, 라고 포기한 것도 아니다. 나 나름대로 외향성을 키우고 말도 더 잘하려고 애를 써봤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내성향인데다 워낙 오랜 세월 이 성격을 감수하며 살아오다보니 고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업계 경력 10년차 이지만, 인맥은 참으로 좁디 좁은 편이다. 혼자 사무실에 처박혀 내 일만 해도 어려움이 따르는데, 앞으로 더 큰 활동을 한다면 이런 내 성향은 큰 짐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 책 내용도 참으로 가볍고 모순되거나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오는데도 저 책에서 큰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내 성격을 고치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 맞물렸기에 그럴 것이다.
집들이 기획
집들이를 하긴 해야지, 하는 느슨한 마음가짐이었는데, 저 책에 자극을 받고선 나를 바꾸는 노력 일환으로 집들이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직업에 맞게 바로 집들이 기획을 시작했다. 궁리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기획서를 썼다.
간단히 적자면,
- 내가 아는 사람들 중
- 서로 모르거나 좀 막연한 사이인 사람들을 초대해서
- 서로 인사 나누며 인연을 만들어가는
자리가 이번 집들이 목적이자 주제였다.
내 한 칸짜리 방이 워낙 작으므로 한 번에 5~6명만 부를 수 있는데, 집들이를 기획하다보니 내가 집들이 초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30여명 정도였다. 그래서 총 네 번에 걸쳐 집들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섯 번은 너무 길었고, 세 번은 하루에 참석하는 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한 분 한 분께 메신저, 전자우편, 전화로 연락해서 참석 가능 여부와 2월 14, 15, 21, 22일 중 참석 가능한 모든 날을 여쭤보니 스물 서너 분께서 응답을 해주셨다. 그래서 개개인의 참석 가능한 날, 관심사, 직업, 성격을 참고해서 집들이 나흘 중 하루로 각각 배정했다. 물론, 집들이 목적이자 주제에 맞게 되도록 서로 많이 친한 사람은 떨어뜨리려 했다.
집들이 선물은 뻔뻔할만큼 명확하게 현금을 요청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큰 꾸러미 하나나 세제 5kg 짜리 하나면 일 년 가까이 쓰는데, 이들을 중복되게 받고 싶진 않았다. 마침 세탁기가 고장난 상태이니 세탁기 사는 데 필요한 돈 일부를 집들이 선물로 받아서 내게도 꼭 필요하고, 집들이 참석자도 선물 고민을 줄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선물 주는 사람도 신경 덜 쓰이고, 선물 받는 사람도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선물이야 말로 성의있는 것이 아닐까?
집들이 진행
14일 집들이
첫 번째 집들이는 2월 14일이었다. 걱정대로 오랜 시간 집들이에 함께 할 수 없다는 분도 계셨고, 갑작스레 일이 생겨서 올 수 없는 분도 계셨다. 결국 14일 집들이는 취소했다. 하지만, 나머지 15, 21, 22일 집들이는 성공이었다.
15일 집들이
15일 집들이는 어쩌다보니 참석자 모두가 서로를 어느 정도 알거나 친분이 쌓인 사이가 많았다. 중간에 일정을 조절하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고, 서로 만나본 적 없었는데 집들이를 앞둔 며칠 전에 서로 만나서 알게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집들이 목적성은 조금 옅어졌다.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집들이 중에 사진 찰칵"][/caption]
말솜씨 좋은 사람이 많이 모인 날이다보니 다른 집들이 날과 비교해서 가장 시끌 시끌했고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특이한 점은 최근 창업을 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사람, 최근 몇 년 사이에 창업을 한 사람을 모두 합쳐서 무려 네 명이라는 점이다. 다섯 명 중 네 명이 CEO(최고경영자)이거나 예비 CEO이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대화 주제는 사업이었다. 다들 농담처럼 가볍게 웃고 떠들며 즐겼지만, 대화 밑에는 사업이라는 강한 주제가 깔려 있었다. 꿈을 담은 주 사업이 아니라 현실에서 돈을 벌어다주는 사업으로 현금을 만들고, 그 현금으로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는 쪽으로 다들 마음이 맞았다.
21일 집들이
21일도 14일처럼 집들이를 취소할 위험에 처했었다. 하지만, 집들이에 올 수 있는 사람이 한 분이어서 취소했던 14일과는 달리 21일엔 두 분이 오실 수 있었다. 그래서 취소하지 않고 진행했다.
14일이나 22일과 달리 사람이 적다보니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난 되도록 참석자 대화에 끼어들기 보다는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만 하려 했기 때문에, 대화 집중도가 높았다. 물론, 대화 흐름은 15일보다 자주 끊기긴 했지만,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집중력을 보인 것이다.
처음엔 서로 잘 모르다보니 집중도에 비해 흐름은 자주 끊기긴 했지만,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자 흐름을 타기 시작했고, 집들이를 마칠 때쯤엔 서로가 가진 경험이나 지식을 더 나누기에 바빴다. 시간 부족한 게 아쉬울 정도.
22일 집들이
22일은 대화나 무리를 이끌어나가는 성향이 크지 않은 분들이 모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대화가 잘 일어나거나 길게 이어지질 못했다. 이런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기획서를 쓸 때도 이런 상황을 고려했는데, 이런 경우엔 참석자들의 공통되게 알고 있고 공유할 수 있는 대화 소재인 나 자신을 대화라는 도마 위에 재료로 올리기로 했다. 되도록이면 나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나를 우스개소리로 삼을 수 있게 해야 했다. 재치와 말발이 부족해서 생각대로 잘 되진 않았지만, 나 나름대로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15일이나 21일은 대화에 뚜렷한 주제가 있었다면, 22일은 주제를 꼽을 수 없다. 작은 주제 여러 가지가 등장했다. 여성분이 두 명이라 남성으로만 참석자가 구성됐던 15, 21일보다 더 작은 여러 주제가 나온 탓도 있지만, 서로 어색한 이유가 가장 컸다.
대화는 10시쯤 이르자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자극을 주어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진한 복준자주를 꺼냈는데, 그 시기가 때마침 서로 서서히 알아가던 때라 새 자극과 맞물려 대화 흐름이 잡힌 것이다.
흐름과 틀이 잡힌 대화는 15, 21일과 많이 달랐다. 자신이 알거나 경험한 바를 얘기하는 것은 이전 날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말하는 이의 말 대상과 주체가 자기 자신이었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서로 잘 모르거나 친분이 별로 쌓이지 않은 관계에서도 그러한 대화가 가능했고, 즐거웠다.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22일 집들이까지 모두 마치고 난 뒤..."][/caption]
교훈
이번 집들이를 치르면서 깨달은 바가 많다.
우선 선물로 현금을 요구하면 처음엔 어색해하지만, 선물을 하는 사람은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대부분 사람들은 곧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몇 명은 오히려 좋아했는데, 선물로 현금을 주고 싶어도 받는 사람이 성의없다고 느낄까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현금 선물을 하는 것에 큰 거리낌을 갖진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과 좁은 곳에 모여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는 것에 사람들은 흥미로워하고 재밌어하면서도 부담을 가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부담은 그 일이 닥친 때보다는 그 일이 닥치기 전에 훨씬 컸다. 이 일을 꾸민 건 나이지만, 누군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초대한다면 당일에도 갈까 말까 고민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모임 전에 좀 더 꼼꼼하게 사람들을 챙겨서 그러한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먹을 게 끊이지 않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이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앉아 있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다. 그럴 땐 무의식 중에 도망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는데, 도망가서 부담을 줄일 대상이 없으면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 있다. 나는 이걸 음식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음식을 한 번에 꺼내놓아도 곤란하다. 상이 허전해보여도 한 번에 한 두 종류만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낫다. 나는
- 닭볶음탕 + 밥
- 삼겹살 혹은 갈매기살, 술은 천천히.
- 과자와 과일.
- 입가심 (차나 복분자주)
순서로 음식을 제공했는데, 약 다섯 시간 동안 하나 하나씩 내놓으면 쉬지 않고 음식이 나오는 것 같다. 이는 배가 부르거나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음식이 끊이지 않고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모임 진행이 잘만 된다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모이더라도 서로를 알아가며 즐거운 시간을 공유할 가능성이 생각보다 아주 크다는 걸 집고 싶다. 물론, 주최자나 진행자는 참석자 모두를 알아야 하며, 참석자 역시 주최자나 진행자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행자는 더 세심하게 사람 한 명 한 명 신경쓰며 진행해야 한다.
마무리
사람들은 서먹함과 어색함을 이겨내며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모르거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과 어울리거나 맞는 부분을 찾는 즐거움은 결코 작게 보면 안 된다.이것을 찾아서 모르던 사람과 인연을 맺거나 잘 모르던 사람과 인연을 더 돈독히 하는 것이 이번 집들이 목적이었고, 참석자들 모두 진심이든 빈말이든 즐거웠다는 말을 하고 집들이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니 집들이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집들이를 기획하면서 쓴 기획서를 공유해본다. 기획서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다. 그때 그때 생각난 것을 정리해서 쓴 것에 불과하다. 또, 블로그 글에 참석 여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어서 집들이 초대할 사람 개개인에 대한 내용도 다 들어내서 더 허전해보인다. 이를테면, C이라는 분이 최근에 어떤 행사에 참여 했다거나, L님은 딸기에 관심이 많은데 이에 대한 건 J님이 잘 알고 있다는 걸 미리 준비해서 모임 진행을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빼서 사실상 개요 정도만 남은 기획서이지만, 집들이 기획이 궁금할 분들을 위해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공유해본다. 아마도 집들이에 오신 분들이 가장 궁금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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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파일 : 집들이 기획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