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려서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은 새벽 3시 40분.
18 Apr 2009고백하자면, 요즘 살짝 우울기에 빠졌다. 지난 1년 동안 일이 안풀려도 이렇게 안풀릴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안좋은 일들이 여러 번 생겼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이 의기소침해졌기 때문이다. 더 예전과 비교하면 약 다섯 배 정도는 안좋은 일이 마구 나를 두들겨팼다.
핑계를 들자면, 이런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요즘 꽤 많이 탱자 탱자 놀고 있다. 회사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20% 정도만 해내고 있다. 내게도 회사에게도 낭비다.
열심히 해도 일이 더럽게 꼬이면 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곤 하는데, 이때 도망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책 속이다. 책 읽으며 공부하는 “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머리가 안좋아서 공부한 걸 기억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만큼은 결과를 얻는다. 열심히 일했는데 갑에게 사정이 생겨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책 읽고 공부하는 건 꽤나 믿을만하다.
다시 고백하자면, 그래서 요즘엔 책읽기나 공부를 평소보다는 좀 더 하는 편이다. 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늘 책읽기와 공부를 조금씩이라도 하지만, 요즘은 도망치는 꼴로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올해부터는 내가 하는 일을 한 눈으로 살펴볼 수 있게 눈에 잘 띄이는 기록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창에 붙인 종이판에 읽은 책을 굵은 글씨로 쓰는 것이다. 1월 1일부터 오늘까지 36권을 읽었다. 작년보다 두 배 많다. 출퇴근 시간이 작년보다 두 배 늘어난 탓도 있긴 하다.
또 핑계를 대자면, 책과 공부에 달려드는 게 아니라 도망치듯 도움을 받듯 책과 공부를 대하면 효율이 떨어지긴 해도 마음은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도망을 멈추고 슬슬 정면돌파를 준비하게 된다. 근데 오래도록 이 핑계마저 먹히지 않았다. 심장이 가출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몸에서 나간 심장을 되찾아와 잘근 잘근 씹어 삼켜 몸 안에 도로 넣어놨다. 아직 제 위치에 없는지 가슴은 뛰지 않고 배만 꾸룩거린다. 아, 배고픈건가. 돈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다. 그래도 심장에 빌붙어 함께 도망갔다가 함께 체포되어 돌아온 이성은 빠르게 머리에 자리를 잡았나보다. 최근 있었던 불운을 외면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재수에 붙었던 옴은 남이어서 나를 두들겨패는 것이 아니다. 그 옴 역시 내가 함께 해야 할 놈이며 그 자체가 곧 나이다. 재수에 옴 붙었다며 호들갑 떨고 도망치고 부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외면하는 짓이다.
비유를 하자면, 재수에 붙는 옴은 감기와 비슷하다. 감기를 일으키는 원인은 아마도 무궁무진할테고 앞으로도 평생 내 면역력이 약해질 틈을 노릴 것이다. 그게 무서워 피해다니고, 그러다 감기에 걸리면 골골대며 투덜거리면 안 된다. 그래서는 평생 감기는 내 적, 아니 실은 일방되게 나를 농락하는 천적이다. 감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갈고닦으며 면역력을 키운다면 몸 안에서 잠깐 일어난 아주 작은 반항일 뿐이다. 마치 인구 얼마 없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작은 자동차 추돌 사고 정도?
다시 말하자면, 한동안 내 재수에 붙어서 나를 괴롭혔던 옴이라는 감기같은 존재도 내 면역력이 부족해서, 즉 내가 부족해서 괴롭고 힘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보다 훨씬 힘들고 어렵고 아픈 일도 견뎌냈다. 이겨냈다고 말하긴 좀 머쓱하고 단지 견뎌낸 정도이지만, 그 덕에 아직 숨을 쉬며 졸려서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30분 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감기가 좀 지긋 지긋하게 오랫동안 자주 걸린 것 뿐, 암이나 백혈병 같은 치사율 높은 병에 걸린 게 아니다.
마치 남처럼 서먹하고 가끔은 꼴도 보기 싫던 그 재수의 옴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나니, 이제 주유천하를 떠날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하늘, 아니 2미터 조금 넘는 낮은 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려본다.
“감기는 나았다. 이로써 내 면역력은 강해졌다.”
팽. 코나 풀고 자야지. 콧물 때문에 집중이 안 되어 책을 못읽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