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쁜 그 여자
16 Sep 2006출근 길. 잠실역에 다다르자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러 걸어간다.
요즘 회사 일에 신경을 많이 쏟았더니 아침 식사를 하고 똥을 누고 나서도 잠이 쉬이 깨지 않는다. 버스에서도 눈만 말똥 말똥하지 정신은 멍하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구르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면서 슬슬 잠이 깨긴 하지만 여전히 반쯤 멍하다.
자연스레 내 앞으로 새치기를 하는 아주머니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 뒤에 사람이 없다면야 내 앞에서 새치기를 해도 개의치 않지만 내 뒤로 너댓명이 줄 서있다보니 어리바리하게 새치기 당한 것이 뒷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열차 문이 위치할 곳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그 위치 사이 사이 공간은 좀 한가하다. 그렇다고 아주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줄을 서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 몇 몇이 띄엄 띄엄 있는데, 열차가 역 안에 들어오면 슬금 슬금 열차 입구쪽으로 다가오다가 열차 문이 열리면 스르륵~ 하고 끼어든다. 나는 대체로 새치기 당하는 어리바리한 청년 역할을 거의 매일 도맡는다. 방금 아주머니처럼 나를 상대로 열차가 오지도 않았는데 대놓고 새치기를 하는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열차가 왔을 때 공격수의 공을 슬쩍 가로채는 축구 선수 김남일처럼 옆에서 끼어들어 나보다 먼저 열차 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굳이 하는 자와 당하는 자로 역할을 나눌 필요는 없지만, 새치기 하고 싶어 새치기 하는 사람은 새치기 당하고 싶어 새치기 당하는 사람보다 수가 많을 것이다. 새치기 당하는 걸 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므로.
새치기를 하는 역할과 당하는 역할로 사람을 구분했을 때, 나는 당하는 역할을 더 잘하고 그 여자도 나랑 마찬가지로 보인다. 다른 점은 있다. 나는 새치기를 당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당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 여자는 누군가 그 여자 앞에 끼어 들었을 때 끼어드는 사람과 당한 사람의 몸놀림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여자가 새치기 당하기 전에 스스로 공간을 내주는 걸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람 사이 사이에서 누군가는 소매치기를 하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회칼로 배를 쑤시고 누군가는 고통에 차 한 팔을 번쩔 들고 비명을 지를 지라도 그 무리를 멀찍이 물러나 넓게 바라보면 그냥 한 덩어리의 자연스러운 꾸물 꾸물한 움직임이다. 그 여자가 새치기 당하는 것도 그런 식이어서 분명 공중 도덕을 논할 주제로 충분한 새치기가 이뤄지는대도 그 여자를 둘러싼 그 풍경 자체는 원래 있을 법한 느낌이다.
어쩜 저리도 자연스럽게, 위화감 없이 새치기를 당할 수 있을까?
재밌기도 하고 그 능숙함에 관심이 생겨 그 여자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고개 한 번을 내쪽으로 틀지 않아 옆모습에서 여자 특유의 곡선을 볼 뿐이다. 그런데, 열차가 신천 역을 향해 출발할 때였다. 그 여자가 내 쪽으로 왔다. 나는 7번 칸의 2번 문 부근에 바보처럼 꾸겨져 서있었다. 팔을 내리자니 열차가 크게 흔들릴 때 내 주변 여자의 가슴이나 엉덩이에 내 팔이 닿을 염려가 있어 두 팔을 만세하듯 올리고 있었다. 손잡이도 잡지 못해서 빈약해 보이는 내 팔이 공중에서 덜렁거린다. 아무것도 잡지 못해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추고 발로는 땅을 움켜쥐듯 종아리와 허벅지를 긴장 시켰다. 마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버둥대며 신을 불러들이는 사이비 주술자 같았다. 거북이 등껍질을 연상케 하는 큼직한 등 가방을 등에 달고 멍청해 보이지만 실속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청년 근처로 힘겹게 다가온 그녀는 용케도 문 바로 옆 쇠 기둥의 빈 공간 속으로 들어가 쇠 기둥을 기대어 섰다.
참 예뻤다.
예쁘다는 말에는 절대 기준이 없다. 무엇과 비교를 하건, 혹은 어떤 관점의 차이가 있던지 상대되는 기준에 따라 예쁘다는 판단을 한다. 그런 기준은 사람마다 오묘하고 다양하다. 특정 사회 집단을 한 무리로 잡고 그 무리 속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예쁜 것을 판단하는 상대 기준의 비슷한 점을 모아놓으면 절대 기준 비슷한 사회 기준이 마련된다. 예로 김태희는 예쁘다는 말이 대체로 두루 인정 받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여자는 그런 사회 기준으로 봐도 참 예쁘고 내 상대 기준으로 봐도 참 예쁘다. 뇌를 앞뒤로 반을 갈라서 왼쪽 뇌와 오른쪽 뇌로 구분한다면, 아침 9시 30분 쯤 내 뇌는 양쪽 귀가 있는 위치에서 반을 갈라 앞쪽 뇌는 깨어 있고 뒤쪽 뇌는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예쁜 이마와 얼굴, 볼, 코, 입술, 턱, 턱선, 목, 빗장 뼈, 어깨 선, 오목한 허리 선과 부드럽지만 직선에 가까운 다리 선을 보자 내 뒤쪽 뇌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버렸다. 갑자기 내 멍청해 보이지만 실속 있는 내 자세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렇다. 여자가 무척 예쁘거나 아름다우면 너무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받아들인다. 그 여자를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잠에서 깨어버린 내 뇌는 어느 덧 어떤 노래의 한 구절을 부르고 있었다.
But I'm a creep, I'm a weirdo.
전 불쾌하게 생겨먹은 송충이같은 놈이에요, 맛간 놈이기도 하고요.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빌어먹을, 제가 지금 여기서 뭔 짓을 하는 거죠?
I don't belong here.
전 당신이 있기에 마땅한 이런 밝고 화목한 곳에 속할 수 없는데...
나에게 Radiohead의 Creep을 부르게끔 만드는 여자이다.
다른 곳을 보다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윽! 눈 부셔!”라며 두 팔을 다급히 들어 그 빛을 막으려고 방어 동작하다 너무도 밝은 그 예쁜 생김새 앞에선 다 부질 없음을 깨닫는다. 눈꺼풀을 뚫고 홍채를 지나 시신경을 찔러대는 강한 빛에 시력을 잃을 무서움이 들자 나 자신을 때려서라도 기절해서 빛을 피해야 겠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몸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말과 생각으로, 주로 어둡고 부정하는 것들로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계속해서 어둡고 냄새나고 더러운 존재로 만들다 보면 어느 새 그 밝은 빛에 대항할 어둠이 된다.
난 그런 자학엔 관심과 취미가 없는고로 저 빛의 세기를 줄여보기로 했다. 이를테면, 저 여자가 아침에 똥을 누고 똥구멍을 잘 닦았을까? 혹시 제대로 닦지 않아 찌꺼기가 엉덩이 살 사이에 몽글 몽글 피어나는 땀과 어울려 지금쯤 똥구멍이 간질 간질하진 않을까?, 식이다. 끝내주게 예쁘거나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Creep이 되어버리는 한심한 청년 덕에 그 여자는 졸지에 아침에 뒷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않아 똥구멍이 간질 간질한 상황에 놓인 가엽지만 지저분한 여자가 되었다.
내가 졌다.
온갖 생각으로 Creep이 되지 않기 위해 싸워봤지만, 휴대 전화기로 배달된 단문(SMS)을 보고 헤식~ 미소 짓는 그 모습에 내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1차판(stage)를 힘겹게 넘을 둥 말 둥 하고 있는데 대뜸 2차판 두목이 나타나 한 방에 기절시키는 반칙스러운 미소이다. 그뿐이랴. 머리 속에서 그 여자에게 온갖 검정 포대기를 뒤집어 씌운 그 죄 조차 사해주시나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비록 예쁜 겉모습과 미소 한 방으로 성냥개비 머리처럼 둥글게 덥수룩한 내 머리카락과 멍청해 보이지만 실속 있는 주술사 같은 내 자세를 나 스스로 창피하게 만들긴 했지만, 하루를 설레게 하는 예쁜 여자였다. 알맹이를 우물 우물거리다 씨를 툭 내뱉듯 선릉 역에서 내리려는 사람에 떠밀려 열차에게 내뱉어진 나는, 안타깝게도 선릉 역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그 여자를 흘깃 바라보고는 역을 나섰다. 그리고, 문구점과 토스트 가게를 지나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몇 분 사이 그 예쁜 여자의 생김새는 어느 새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예뻤다는 설렘만이 증거물로 남아 흐릿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