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듣기

1

윤도현 의사랑했나봐라는 재미난 상황을 본 뒤로 '윤도현의 사랑했나봐'를 들을 때마다 해당 가사 부분이 이상하게 들린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자꾸 이렇게 들린다. '사랑했나봐'를 발음하기 직전에 묘하게 짧은 여운이 느껴지는데 이 여운이 '의'로 들린다. 마치 묵음이지만 존재는 명백한 영어 단어의 철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2

영어 회화 교재를 듣다보면 모르는 단어는 이미 알고 있던 단어로 들리는 경우가 많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초반 가사 Early morning, she wakes up. Knock, knock, knock on the door가 "오뢴마네 지뷔서 바나납 머어떠(오랜만에 집에서 바나나 먹었어)"로 들리는 것처럼.

what is the bet?
10 thousand won.

실제 내용은 누가 영어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지 만원 내기(bet)하자는 내용인데, 내기(bet)를 야구방망이(bat)로 들어서 만원짜리 야구방망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로 이해한 적도 있다.

3

사람은 무의식 중에 듣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을 실제로 들리고 보이는 것보다 우선시 한다. 윤도현이 의사랑 뭔가 했다고 노래 가사가 들리거나 잘 몰라서 엉뚱하게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의식이 아닌데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접하는 경우도 있다. 한동안 내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듣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만 찾아다닌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잊기와 사랑에 빠지기

난 감정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감정으로 표현되는 감성도 이성이 만들어낸 작은 존재일 뿐이라 생각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 내 눈을 통해 그녀를 인식하는 것은 내가 그 여자를 봤기(look) 때문에 아니라 단지 그 여자가 내 눈에 보이기(see) 때문이다.

내가 이 여자에게 사랑하게 되어서 열병이 들려면 단 한 가지만 행하면 된다. 그 여자를 계속 생각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좋다. 며칠 전, 무심히 눈에 보였던 그 여자가 입었던 옷이 무엇이었더라? 그 여자의 머리카락 모양은 어떠했더라?

그 여자에 대한 단촐한 정보 몇 가지를 토대로 계속 떠올리다보면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그 여자에 대한 상상으로 어느 새 바뀐다. 머리로 떠올리던 일이 어느 새 마음으로 떠올리게 된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머리 속에서 떠올렸던 그 여자에 대한 여러 모습들과 실제 모습들을 맞춰보게 된다. 일치하면 아무 이유없이 웃음과 미소가 나오고, 일치하지 않으면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증이 더 커진다. 머리에서 이뤄지는 그녀에 대한 생각은 마음에서 이뤄지는 그녀에 대한 상상에 짓눌리는 상황이다.

그 여자를 잊는 방법은 그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만큼 간단하다.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설혹 마음이 머리를 삼켰을지라도 한번쯤은 마음이 아닌 머리로 그 여자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여자와 결혼해서 함께 사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하는 때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떡해서든 그 여자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고,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면 나를 휘감았던 불치병은 보이지 않게 느낄 수 없게, 하지만 분명하게 잊게 된다.


이제까지 했던 말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내게 일어나는 감정들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너무나. 너무할 정도로. 이 쉬운 감성의 꿈틀거림에 휩쓸리고 애닳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내 감성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던 그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얼마 있지 않아 무심한 존재가 되곤 한다.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아직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엉뚱한 상상도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고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