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서태지 서태지 서태지

우리 나라에는 위대한 뮤지션이 많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많은 지 적은 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위대함을 열렬히 뿜어대는 강한 뮤지션이 많다. 조용필, 신중현, 신해철, 임재범, 조규찬, 이병우, 양방언(재일교포이지만), 한대수, 김창완, 그리고 문희준(으으으으으으으으음??????). 물론 이 분들 외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다. 단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미처 연상 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로다.

잠깐. 위에서 정모씨의 아들 모현철이라는 사람, 혹은 서모 태지라는 사람이 빠짐에 발끈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모씨의 아들 모현철이라는 사람, 혹은 서모 태지라는 사람(이하 서태지)라는 사람도 충분히 훌륭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로 끄집어 내서 각별히 문장 하나 더 할애하여 훌륭하다고 하는 이유는 나이 30대에 접어든 미소년(?)에 대한 생각을 끄적이기 위해서이다. 도마 위의 생선은 한 마리씩 손을 봐야 제 맛이다.

19921996. 내 아이디의 비밀 번호이다. 지금 접속을 시도해보자.
.?!
.?!
.?!
만일 정말 시도했다면 2004년도 한해의 계획을 다시 수립하길 권한다. <span class=key1 onclick=keyword_open('./kview.php?kd=%C7%D1%B3%AF')>한날</span>군의 말장난에 속지 말자고. 이 숫자의 나열을 아는 사람이라면 90년대를 알차게 보낸 사람이다. 1992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을 발표한 해요, 1996년은 4집을 마지막으로 은퇴한(해체한) 해이다. 임백천이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에서 76점이라는 혹독한 점수를 받았던 그들은 76점짜리 음악으로 대한 민국 음악 흐름을 바꿔 놓는다. 그렇다고 그 76점을 주었던 심사 위원들(?)을 비웃고 싶지 않다. 변화는 대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재평가를 받기 일쑤니까.

76점짜리 음악을 하던 3명의 아이들이 한 나라의 음악 문화를 바꿔 놓자 그들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집 이후의 행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 무럭 무럭 자라거라 」가 아닌 「 니가 과연 이번에도 1집 때처럼 강렬한 방귀를 낄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겠다. 」 식의 관심을.

1993년, MBC의 쇼 프로그램. 어두컴컴한 무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며, 그 속에서 비트박스가 들려온다. 품붐붐붐 (헤헤엑헤엑헤엑) 뿌붐부붐부붐 (헤헤엑헤엑헤엑). 1분여의 Intro (Yo! Taiji!) 가 끝나자 바로 2집의 시작을 알린다. 하여가. 이때는 과연 몇 점을 받았을까? 히히. 하여가는 격찬을 받았었다.

여름이었다. 1994년의. TV 가 알려준 것인지 동네의 친구가 알려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태지 3집의 발매 소식을 들었다. CD 로 살 테다! 나는 책상 서랍을 뒤져서 꼬깃 꼬깃한 지폐를 모셔들고 30분을 걸어 서태지 3집을 구매하였다. 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 3집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단히 뛰어난 앨범이었지만,

교실이데아의 안흥찬님의 수꾸임(Scream)을 거꾸로 들으면 피가 모자른다는 악마의 소리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더 유명한 상황이었다. 나 역시 그 부분을 컴퓨터에 녹음하여 거꾸로 돌린 걸 다시 녹음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배포 했으니까. 서태지의 창백한 얼굴도 교실이데아의 그 부분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어찌 되었건 3집 역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서태지는 점점 교주화 된 듯 싶다. 신비주의란 말도 이 앨범부터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규 앨범 중 유일하게 타이틀곡이 2번 트랙이 아닌 4집은 정말 말이 많았던 앨범으로 1995년에 발표되었다. Come back home 으로 가출했던 아해들이 귀가 했다는 둥, 슬픈 아픔의 가사가 있는 앨범 표지의 여자 애 손가락이 기형이라는 둥, 시대유감이 사실은 가사가 있는데 심의로 짤렸다는 둥, 필승은 정말 예술이라는 둥, Free style 에서 김종서는 밥맛이라는 둥(음?). 갱스터 랩이니 뭐니 하며 한참 표절 시비도 많이 붙었다. 정말 얘기할 거리가 많은 앨범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얘기들을 한 방에 잠식시키는 이야기 거리는 1996년에 터져 나왔다. 은퇴 선언.

별로 자세히 얘기하지도 않으면서 각 정규 앨범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앨범 하나 하나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총 4장의 정규 앨범들은 지향하는 장르가 제각각이었고 앨범이 발표될 때마다 또 새로운 거 들고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1집의 댄스, 2집의 테크노, 3집의 메탈, 4집의 락.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은 없었다. 3명이 나와서 춤과 노래를 겸했던 것은 1986년 소방차가 이미 보여줬고, 댄스 음악 자체가 이미 생소한 음악이 아니었다. 테크노는 외국 뮤지션을 통해 매니아층이 있었으며, 메탈은 국내 굵직한 밴드가 이미 많았다. 서태지 본인이 활동했던 시나위도 건재했었고. 락? 뭔 말이 필요하리. 생소할 것이 없음에도,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연 서태지가 보여주었던 4장의 정규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의 행보는 새롭지 않았을까? 단지 해외에서 유행하는 장르를 국내에 보급한 유통 업자로 치부할 정도일까? 그렇지 않다. 그의 음악은 새로우며 놀라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국내에 생소한 음악을 소개해서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음악을 소개하고 대중적으로 만들기에 새롭고 놀라운 것이다. 발라드 일색이었던 국내 가요 시장을 그는 1집 하나로 댄스를 대중적인 음악으로 만들었고, 국내에 테크노 뮤지션 수가 많지도 않았고 시장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 하여가의 리메이크, 수시아 등으로 우리 나라의 사람들에게 테크노를 귀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이미 기라성 같은 블랙홀과 시나위가 떡 버티고 있는 국내 메탈 음악계도 매니아 시장이었지 대중적인 음악으로 발돋음을 하지 못하였던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메탈 음악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며 메탈을 대중적으로 이끄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교실이데아라는 노래에서 춤을 춘 것은 충격이다) 4집. 말 해 무엇하리.

서태지의 진정한 힘과 능력은 새로움/생소함을 창조하는 것 자체보다는 생소함을 대중적으로 만드는 힘이다. 음악의 다양화는 대중화에 기반을 두기에, 서태지 자신이 풀어낸 장르의 음악이 설령 그 장르의 본래의 것보다 부족해도 위대한 것일지어다. 물론 음악도 훌륭했기에 대중화가 가능한 것이지만.

자. 이제 칭찬은 그만하자. 난 악당 체질이라 끝없는 칭찬은 하지 못한다. 입이 근질 거려서 나쁜 말도 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그에 대한 불만은 불친절함이다. 신비주의니 뭐니같은 ~~주의 (~~ism)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불친절함이다.

우선 그의 앨범의 가사는 실제 부를 때의 가사와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다. 앨범마다 1곡 이상씩 꼭 있다. 애교스럽게 넘어갈까? 안된다. 지금은 교정되었지만, 서태지의 앨범이 막 출시 되었을 때 노래방 기기 업체들은 최대한 빨리 서태지 노래를 신곡으로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사 확인 안하고 표지에 있는 가사를 그대로 받아 적었었다.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예상한 대로다. 별로 대단찮은 사소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의 진정한 불친절함은 이상한 가사를 읊고선 표지에는 넣지 않음이다. 설명 안해준다. 3집에서 교실이데아를 보자.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

10년이 지난 아직도 ‘#$^!#$%^$#@~’ 이 부분의 정확한 가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태진 미디어 노래방에 나오는 ‘내 사투리 내가 늘어 놓으래’ 가 그나마 가장 유사한 발음을 받아 적은 가사로 지지를 받지만, 노래 자체와는 아~무~ 연관성이 보이지 않는다. 지방에서 전학 온 아이를 표준말 쓰는 서울애들이 따돌리는 상황을 꼬집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서태지 본인은 별 의미 없이 그냥 내뱉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처럼 가사 뜯어보고 연구하는 호기심 많은, 줄여서 표현하자면,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럽다. 이런 부분은 꽤 여러 노래에 있으며, 당연히 표지에 가사로 적혀 있지 않다.

이외에는 불만 없다. 다큐멘터리나 뉴스, 스타크래프트 리그 외에는 TV 를 보지 않기에 그가 매스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나와 아무 상관 없다. 표절 시비 일어날 때 본인이 나와 해명을 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표절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는 거 보면 표절이 아니라는 얘기겠지.

칭찬과 불만을 얘기 했으니 이제 뭘 말 한다? 할 얘기 하나 더 있다. 이건 그의 특이점이다. 서태지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구석이 하나 있는데, 자신의 음악을 자신이 리메이크한다는 점이다. 앨범으로 출시 안한다. 무대를 위해 리메이크를 한다. 1집 때부터 그는 자신의 음악을 자신이 재해석해서 다른 느낌으로 만들어 왔다. 예외가 있다면 3집 정도? 다른 정규 앨범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3집도 콘서트에서 들려주는 음악의 느낌은 사뭇 새롭다.

양현석에게 드럼을, 이주노에게 베이스를 매달고 필승을 외쳐 부르던 서태지. 이미 그들의 해체는 필승이라는 노래에서 예견 된 것일지 모른다. 지금은 서로 각자의 음악을 하고 있고, 며칠 뒤면(2004년 1월 10일 기준) 그의 새 앨범이 세상에 공개된다. 그리고 기대된다. 그는 이번에 어떤 음악으로 어떻게 그 음악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낼지. 어떻게 그의 옛 음악을 리메이크할지. ^^

■ Special thanks to ...
맹님


난 술을 즐길 줄 모른다

난 술을 즐길 줄 모른다. 혀의 무능력함이(?) 첫째요, 두뇌의 무능력함이(?) 그 둘째 이유라 할 수 있다. 이 단백질 덩어리가 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뚜렷한 지론과 기준이 있는 탓에 나는 술을 즐길 줄 모른다. 우씨 ...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의 맛을 판별한다. 술을 못마시는 사람도 맛을 판별할 줄 알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런 이들은 단지 맛을 감각으로 느낄 뿐이었다. 누구나 홍차의 맛이 씁쓸한 것쯤은 한모금만으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나는 술의 맛을 거의 판별 못한다. 일부 술을 제외하고는 전부 동일한 쓴 맛으로 접수된다. 물론 향(냄새)은 느끼지만 맛과는 별개 아닌가? 꼬냑만 하더라도 그 은은한 향은 좋지만 맛은 쓰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입에 쓰면 그냥 입에 쓴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난 술의 쓴 맛은 아직도 즐길 줄 모른다.

술은 두뇌의 신경계를 자극한다. 그러기에 별과 해가 함께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입술이 반딱반딱 보이는 거겠지. 두뇌의 그 부분이 약한 이는 두뇌로 입력되는 정보가 더 이상 접수되지 못하는 현상, 즉 필름이 끊기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두뇌의 그 부분이 너무 강하다. 흔히들 술 기운에 빌린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 못한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심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여자를 꼬옥 껴안아주거나 키스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 마저도 잘 억누른다. 물론 꼭 술만이 아니라 중독성 있는 모든 것에 강한 내성을 보인다. 담배와 마약류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커피를 비롯한 중독성이 있는 것들을 장기간 다량 복용해도 중독 현상은 없었다. 내가 단언하는게 아니라 주변에서 인정하는 점이다. 물론 술이 맹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술은 술이어서 정신과는 달리 몸은 반응한다. 마시면 몸이 나른해져서 피곤해지고 많이 마시면 먹은 것을 게워내야 한다.

당연히 술을 마실 일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술 사준다는 만남에는 귀찮아서 안나가곤 하지만 스파게티 사준다면 바로 머리 감고 빤쭈도 갈아입는다. 맛있는 거 사주는 사람에게 깔끔한 모습은 예의다.

술 < 오렌지 주스 <= 사탕, 초콜릿 < 키스. 설명을 하자면 키스는 혀와(???????) 두뇌 모두를 크게 자극하고, 오렌지 주스는 두뇌는 약간 자극, 혀는 크게 자극한다. 기왕이면 오렌지 선업이나 아침에 주스 오렌지가 좋다. 술은 아무 것도 자극하지 못한다. 그래서 재화 가치로 봤을 때 술은 내게 있어서 가치가 대단히 떨어진다.

재밌는 점은 술과 키스의 관계에 있다. 서로 맨 끝에 자리 잡고 앉아 힘 겨루는 구도에 있는 술과 키스가 함께 했을 때 서로에게 힘이 가미된다는 점이다. 오해 하지 말자. 술을 먹여서 여자와 키스를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인과 술 한 잔하고 키스를 하면 키스가 무척 강렬했다. 코미디의 한 장면이다. 침 질질, 후루룹. 쪽쪽쩝접, 흐으으으읍~ (숨 차서 숨 쉬는 소리). 완전히 잡아먹을 듯한 태세가 된다. 아. 너무 얘기가 상세해진다. 이정도로 하자. 요는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사회 생활하는데 좋겠다고. 맞다. 술 자리에 이뤄지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나는 진 적 없이 언제나 살아남은 승리자였다. 술 기운에 휘말려 어리석은 판단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보면 과연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일까?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

내 주량은 소주 반 병에서 한 병이었다. 이 정도 양이 들어오면 내가 무의식 중에 행하는 행동들이 있다. 우선 물을 줄기차게 마시기 시작한다. 한 시간동안 거의 1리터를 마신다. 안주를 많이 먹는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애교를 떨거나 말로 현혹하여 안주를 시켜낸다. 그리고 대화의 화제거리를 하나 던져준 뒤 난 그 대가로 안주를 열심히 집중해서 먹는다. 물을 많이 마시기에 당연히 화장실에 자주 간다. 주량 정도의 술을 마시면 나는 무의식 중에 술을 해독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사실은 그게 술에 취한 행동 아니냐고.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자기 집은 기가 막히게 찾아들어가는 사람들은 많다. 그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일까 술에 깬 것일까? (별 상관 없는 말 같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술과 관련한 교육을 받아왔다.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는, 먹어도 취하지 말아야겠다는 살아있는 교육이었다. 이론이 아닌 현실로서의 교육. 말을 어설프게 구사하는 꼬맹이 때부터 교육을 받아왔다. 배웠으면 써먹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나는 술못즐김㈜에 입사하기 위한 술맛못느낌 자격증과 술안취함 자격증을 획득했다. 사회에서는 쓸만하다. 그러나 나라는 개인에 있어서는 좋은 건 아니다.

나는 놀이 수단 혹은 방법 하나를 즐길 권리가 없다. 술에 취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의 판단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술에 취한다는 놀이를 한 번이라도 즐길 권리 조차 누리지 못한다. 올해로(2004년 기준) 32살이 되신 애주가 둘째 형님이 말씀하신다(의형제로서 난 막내다). 술을 즐길 줄 모르는 점은 불쌍하다고. 동의했다. 나는 즐길 수단 중 술을 즐기는 것은 혀 끝조차 대보지 못하였다.

뭐, 옵존님의 낭군님, 길동신랑님 말씀대로 술 말고도 즐길 만한 건 많다. 술을 즐길 줄 몰라도 술자리를 즐기지 않은가! 내가 슬픈 것은, 내가 불쾌한 것은, 내가 기분 좋지 못한 것은 술을 즐길 기회의 박탈이다. 손을 갖다 대면 화상 입을 것을 알면서도 된장찌개가 끓고 있는 뚝배기가 지금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궁금해하는데, 「 손 닿으면 다쳐 」 라며 손도 못대게 두 팔을 꽁꽁 묶어버린 것은 심히 즐겁지 않다. 그 두 팔을 묶는 이가 나 자신이라면 더욱 더.

이 글은 옵존님의 나 하곤 안맞는 문화 코드에 대한 트랙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