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의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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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 OS X용 문서 관리 도구인 devonthink에 조금 익숙해졌다. 단순히 자료 집어넣는 습관이 조금 든 정도이지 꺼내보고 분류하는 건 영 어색하니 실제로는 '조금 익숙'이라는 말에도 못미치지만.
결혼에 대한 자료를 찾아 다니다 괜찮다 싶은 정보가 있으면 긁어다 devonthink에 넣던 중 육례(여섯가지 예절) 이야기라는 pdf를 찾았다. 육례란 가례(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 속하는 4례와 공례(향례, 상견례)에 속하는 2례를 합한 것이다. 1994년에 발매되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을 pdf로 공개한 것이다. 900쪽을 넘는 방대한 양인데 난 그것도 모르고 별 생각없이 이 pdf를 devonthink에 집어넣다가 한참을 CPU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힘겹게 5분 가까이 pdf를 devonthink에 넣던 내 맥북은 한참을 달린 사람이 숨을 헐떡이다 서서히 숨이 가라앉듯 CPU 냉각기를 조금씩 줄여나가더라.
애썼어, 맥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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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례이야기를 겪다보니(?) 이 책을 낸 안동권씨 누리집에 관심이 생겼다. 저 책도 안동권씨 사람이 낸 책으로 안동권씨 누리집에서 배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가문에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어떤 책 소개를 보러 갔다. 아직 준비 중이라는 안내가 있는데 그 바로 아래 문장에서 묘한 어색함을 느꼈으니 ...

기대해보세요

라고 한다. 뭐랄까. '기대하세요'보다 '기대하심이 옳습니다'라는 말이 더 재밌는데, '기대해보세요'는 묘한 도전감이 느껴진다. 어디, 기대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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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RSS구독기인 Hanrss를 쓰지 않고 Mac OS X용 RSS구독기인 Netnewswire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탓에 Hanrss보다 훨씬 좋은 무엇을 찾지 못했지만, devonthink와 연계하기도 Hanrss(정확히는 Firefox)보다 편하고 찾기 기능도 있어 좋다. Mac OS X의 spotlight와 연계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수개월간 잘 쓰던 Hanrss를 쓰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는 New york times RSS를 읽을 때 화면이 이상하게 깨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가 Hanrss의 단축 글쇠를 잘못 눌러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무리 관련 단축 글쇠를 눌러도 원래 화면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걸 보니 잘못된 기능 작동이다. Netnewswire를 쓰고픈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이참 저참해서 갈아탔다.

어쨌건 RSS구독기로 몇 십 군데 글을 읽다보면 내가 직접 찾아 방문하는 누리집이 점점 없어진다. 4년 전만 해도 하루에 40군데를 찾아다녔는데 이젠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누리집 찾아다니는 일이 줄었다. 동호회 누리집도 예전같지 않아서 올라오는 글 상당수가 어디에서 퍼온 것이고 개인이 만든 정보물은 별로 없다. 재미나거나 흥미로운 글은 블로그 곳곳에서 돌고 도는데다 그런 글은 대체로 안봐도 그만인 소모성 정보인지라 동호회 게시판은 풍요롭지만 무척 빈곤하다.

누리집을 돌아다니며 노는 데 보내는 시간이 만만찮았는데 이젠 다니는 누리집 수도 많이 줄었다. 아니, 거의 없다. 그런데 일일이 많은 누리집을 돌아다니던 때보다 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묘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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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논문을 보려고 여러 도서관 누리집을 들렀다. 이것 좀 볼까, 하고 논문 이름을 눌러보면 대부분 개요만 제공하고 본문을 보려면 논문 파는 곳에 가서 돈 주고 사서 보던가 도서관에 와서 보라고 한다. 젠장. 가서 보려고 했으면 내가 왜 누리집에서 찾고 다니겠냐. 집에서 보려고 방문한 것이지. 논문을 들여다 볼 가치가 사람이 직접 몸을 이끌고 방문해서 신원 조회 대주고 훔쳐가지 못하게 적당히 감시 당해주는 가치보다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나빠진 논문이시다. 도서관의 닫힌 정책 때문에 애꿎은 논문들만 내게 욕 먹고 있다.

치사해서(?) 대학간다. 기왕 가는 거 도서관 괜찮다는 서울대학교 가고 만다. 퉤퉤.

덧쓰기 : 참 공교롭다. 도서관에 대해 투덜거린 오늘 '2006 세계 도서관 정보 대회'가 열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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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발표하는 사람은 위키피디아이나 자신의 누리집(블로그건 아니건)에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 책으로 낸 것도 아니고 관련 간행물 정도에만 발표하니 찾기도 힘들고 보기는 더 힘들다. 특정 집단이나 단체만 볼 수 있거나 보려면 돈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닌, 즉 자유롭게 누구나 볼 수 있게 발표한 논문이라면 더욱 더 열린 공간에 게재를 했으면 좋겠다. 만백성이 글을 깨우쳐 생각과 말을 글로 보존하여 누구나 속을 채울 수 있게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이 절로 생각난다.


가을 하늘과 여름 구름, 그리고 무지개

집 옥상에 올라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니 송전탑 뒤에 뭔가 보인다. 구름에 얼굴을 찌푸린 하늘의 흐릿함과 구분되는 다채로운 색의 연속.

송전탑 뒤에 숨어있는 무지개

내가 서있는 곳에서 동쪽인 저곳 하늘의 조각에 무지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 길게 걸친 신들의 다리 Bifrost처럼 무지개는 동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가고 있었다.

송전탑 뒤에 힘찬 표정으로 뻗어가는 무지개

많은 사람의 무더위 불쾌함을 모두 닦아냈었던 듯 구름 곳곳은 흐리게 물들어있었다. 구름의 때 묻은 흐림에 무지개는 제 빛을 잃을 법도 한데 오히려 힘찬 표정으로 제 색을 뽐낸다. 몽롱하다.

가을 하늘을 찾는 듯한 새

하늘 저편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점이 되어 가을 하늘을 찾고 있었다. 여름 구름은 지겹다는 듯이 가을을 찾아 빠르게 날아다녔다. 새가 나는 길을 따라 선을 그어보며 어떤 뜻을 찾아보려 했지만 별자리보다 더 알기 어려운 모양만 그려댔다. 어떤 눈설미 좋은 사람이나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 선을 따라 이리 저리 기억 속 모양들을 갖다대다 적당한 이름을 찾아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람이 느껴졌다. 여름의 비릿한 냄새가 조금 섞인 신선한 가을 바람이었다. 다리를 간지럽히는 무엇이 느껴졌다. 얼굴과 팔과 다리를 휘감으며 지나가는 바람님보다 더 생명감 있는 무엇이었다.

잡초

이름 모를 풀. 상추, 깻잎 등 내 입에 넣는 풀이나 잎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름 모를 풀이라 생각하는 내 얕은 지식 탓에 제 고유함을 지녔을 풀은 이름 모를 풀이 된다. 미안한 마음에 사진기에 그 모습을 담고 가만히 쳐다보니 눈에 익다. 우리집 옥상 입구 계단쪽에 피었다 오그리다를 수년째 반복하는 그 풀이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른 풀이나 꽃에 제 집을 잃을만도 한데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도 있던 그 풀이 2006년 가을을 맞이하며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가을 하늘과 여름 구름
사진을 누르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음

밥 먹으라 날 부르는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벽에 등을 대고 매주 내 키를 재던 어릴 적에도 이맘때쯤엔 저녁 먹으라 날 부르시던 그 목소리였다. 이제는 머리가 굵어지다 못해 굳어 말랑 말랑한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하는 아들내미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여전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옥상 계단을 하나씩 조심스레 내려가며 줄곧 내 등 뒤에 있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무지개는 없었지만 가을 하늘과 여름 구름이 구분지어 있었다. 이미 굳건하게 자리 잡은 짙은 가을 하늘, 그리고 서둘러 도망치듯 어딘가로 흘러가는 여름 구름.

2006년 여름은 그렇게 떠나고 있었다. 2006년 가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2006년 여름과 가을, 떠나는 자와 다가오는 자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