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계획표

중학교 다닐 때까지 학교에선 방학을 앞두고 생활계획표를 그리게 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참 순진하고 고분 고분해서 잘 만들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곤 했다.

생활계획표를 짜고 그리다보면 막연한 희망이 몽글 몽글 피어 올랐었다. 이렇게만 하면 난 큰 사람이 될거야, 하는 희망. 내가 아직 큰 사람이 못된 것은 학생 때 짠 생활계획표를 지킨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획을 짜고 지키지 않고, 문제점을 보완해서 다시 짜고 또 지키지 않는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활 계획을 하는데 좋다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비롯해서 각종 도구에 기대봤지만 신통치 않다.

그래도 이런 내가 장하다고 느끼곤 하는데 계획을 짜고 나서 그것을 실천하면 적어도 2주는 지켜왔기 때문이다. 작심삼일을 5번은 반복한 셈이다. 사흘 지킨 계획은 일주일을 바르게 했고, 이주일 지킨 계획은 두달 정도는 바르게 했다. 문제는 이주일 계획을 지키고 바른 기간을 지내는 나머지 육주간은 이주일간 몸에 조금 밴 행동과 생각이 사라지는데 있다. 즉, 이주일간 계획을 지키며 얻는 효과는 단지 거기까지이다.

평생에 효과를 주는 실천 기간은 삼개월 이상 되어야 할 것 같다. 삼개월 동안 계획대로 움직이면, 그동안 움직임이 몸과 머리에 자리를 잡아 오히려 계획에 없이 움직이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 삼개월을 잘 참고 계획을 이뤄내면 내 앞날도 바뀔까?

아무튼, 더이상 올챙이나 병아리로 살기 싫다는 미칠듯한 불만과 욕구와 분노 때문에 생활 계획표를 짰다. 급한 김에 삼개월짜리 생활 계획표를 30분만에 짰다. 30분 짜리라 드팀새 가득하지만, 치밀한 생활 계획표가 오히려 목을 조여 포기하는 계기를 더 자주 만든다고 생각(위안)하기에 이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사실은 잘못된 생활 방식을 크게 고치기 위함보다는 생각 없이 버리는 시간을 좀 더 줄이는데 목적을 두기 위해 평소 생활에 시간이 적힌 이름표만 붙인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내 평소 생활이 이렇게 단조롭구나 하는 서글픔이 들었지만, 단조로움 만큼 편히 사는구나 하는 서글픔만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 5시부터 : 잠에서 깨기. 간단하게 씻기.
  • 6시부터 : 잠에서 깨기. 간단하게 씻기. → 극심한 두통 발생으로 수면 시간을 6시간으로 바꿈.
  • 7시까지 : 집중하고 머리 속에 내용을 담아야 하는 책 보기, 혹은 공부하기
  • 8시부터 : 아침 밥 먹기, 머리 감고 면도하기
  • 9시부터 : 회사로 출발
  • 19시부터 : 퇴근
  • 20시 30분까지 : 가볍게 적바림하며 볼 수 있는 책 읽기
  • 21시까지 : 간단하게 씻기. 저녁 밥 먹기
  • 21시부터 : 만들기, 책 읽거나 책 갈무리 정리
  • 23시부터 : 하루 정리, 가벼운 운동, 씻기
  • 0시부터 : 잠자기

하루 평균 5시간 자는 셈인데, 요근래 잠 자는 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였다. 덕분에 얼굴에는 야물게 여문 여드름이 몇 개 났고, 이번 주 내내 속이 니글거리고 머리가 아펐다. 오늘은 몸이 적응을 했는지 여드름도 슬슬 아물기 시작하고 머리 아픈 것도 덜하다. 니글거리지도 않고.

이 생활 계획표에 예외도 있는데, 당분간 매주 수요일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영어 회화 수업을 들어야 하고, 목요일에는 춤 연습을 한다. 시간을 제법 차지하기 때문에 19시부터 22시, 혹은 19시부터 23시까지 있는 계획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매 일에 집중해서 시간 대비 효율성을 높인다면 하루 8시간 자며 피부 건강에 이바지해도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요즘 내 집중력은 형편 없어서 잠을 줄이지 않으면 하루에 하려는 바를 다 할 수 없다. 류비셰프는 하루 8시간씩 잤어도 많은 일을 해냈고, 그 근간엔 집중력과 단 1초라도 헛되이 쓰지 않는 치밀함이 있었다. 난 아직 그런 치밀함이 없고, 집중력 마저 어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놓고 내린 상황이다.

자, 내일부터 저 생활 계획표를 실천해볼까!


청소

내 머리 속에 있는 두부를...
돌돌 꺼내어 곳곳에 낀 때를 긁어내면 좋겠다.
볕 잘 드는 뒤꼍에 두어 오릇하게 살균했으면 좋겠다.
곳곳에 자리 잡은 보람줄을 모두 빼고 미쁜 기억만 찾아서 보람줄로 갈무리했으면 좋겠다.
산들바람, 막새바람에 쓸데없이 치열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식혔으면 좋겠다.
툭진 덩어리를 찾아내 고샅처럼 날랜 느낌이 나게 했으면 좋겠다.
지금 모습은 쭈글 쭈글 찌그러진 깡통같지만 본새는 건강한 주름이었을 터, 다시금 본새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머리와 가슴 한가운데를 채우고 있던 열정은 사위고,
맛문한 얼굴에선 고결한 땀이 메말랐으며,
드팀새 가득한 가슴에서 새어나온 열기로 심장은 더이상 뛰지 않는다.
능력은 부족했어도 해내고 말겠다는 자신감은 자판의 글쇠 두드리는 것 마저 둥갤 지경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어디로 향하든 휘적 휘적 휘감기는 는개 속을 걷는 마냥 발걸음은 무겁다.

감겨 늦은 아침까지 뜰 줄 모르는 눈은 갓밝이 무렵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벌레를 본 지 오래되어 가리사니를 잡아낼 턱이 있나.
슬프고 슬프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 있는 두부를 꺼내어 청소했으면 좋겠다.
고장난 심장과 굳은 손, 그리고 사미지 말아야 할 것에 고개 숙여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굽어져 버린 자존심을 고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