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CEO의 선 실행 후 수습

작은 회사 최고경영자(이하 CEO)는 구성원이 안/못 하는 일 빼고 다 하게 되는데, 스타트업에서 CEO의 현실 삶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You're not the CEO - you're the Fucking Janitor(당신은 CEO가 아니라 빌어먹을 잡역부라고)이라는 글을 보면 어디든 스타트업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 것 같다. 이런 역할들을 CEO가 잘해서 맡는다기 보다는 해야해서 맡는 게 흔한 현실이다. 물론, CEO는 자신의 본래 업무(?)도 해야하는데 보통은 회사 구성원이 회사에 없을 때에 한다. 가령, 구성원이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한 이후, 혹은 출근하지 않는 공휴일.

나도 (아직은 작은 조직인) 플라스콘에서 CEO로 일하다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다양한 역할(직무, 직군)을 넘나들고 있다. 내가 우스갯소리처럼 회사에서 하는 내 일을 "경리"라고 칭하곤 하는데, 어떠한 비관이나 비아냥없이 내뱉는 순전한 농담이지만 작은 회사에서 CEO 역할을 맡은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마냥 농담처럼 받아들이진 못 하는 눈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이런 CEO로 가장한 잡역부 역할에 불만이 없다. 보통은 즐겁게 일을 치른다. 다만, 각각 따로놓고 보면 전혀 다른 전문성(?)을 요구하는 역할을 다양하게 그것도 거의 동시에 치르다보니 머리가 피곤할 때가 많다. 각 역할을 넘나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맥락(context)를 수시로 전환(switching)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잦은 맥락 전환은 머리에 적지않은 과부하를 일으킨다.

CEO는 잠잘 때도 긴장을 풀지 못 할 때가 많은데[1], 머리에 피로가 쌓이는 상황에서 여러 역할을 넘나들다보면 실수할 때가 많다. 실수 빈도는 CEO가 맡고 있는 역할 수에 비례한데, 각 역할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져서라기 보다는 역할 수만큼 각 역할로 전환하는 횟수가 많고, 더구나 각 역할 별로 대상고객이 달라 스스로 꼬이기 때문이다. 홍보 역할이라면 언론 기자, 행정 업무는 공무원, 프로젝트 관리는 회사 구성원이 고객인데, 가령 기자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기사로 다뤄질 수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꺼림직하다 생각이 들면 바로 오프더레코더나 익명 요청을 해야 한다.

조직이 성장할수록 CEO가 저지르는 실수가 미치는 영향과 파급이 커진다. 실수를 안 하면 될 일이지만, 모든 일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하여 대응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실행(수행)한 일에 대한 수습 능력이 실행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 그래야만 스타트업의 실행력과 속도(절대속도/상대속도)가 높아진다.

내가 CEO로서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바로 수습이다. 수습은 마무리와는 좀 성격이 다른데, 마무리는 어떤 과정을 마치는 단계이므로 실행에 포함되지만, 수습은 그 일을 마친 후 일어나는 후속 일에 대한 대응이다. 즉, 실행 이후에 하는 일이다. CEO 외 역할은 대부분 시작과 실행에 맞춰져있다. 쉽게 말해, 월급을 "실제로" 지급하는 일은 경리겠지만 월급을 지급할 수 없을 때에 대한 수습이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은 조직 구성원 모두가 할 일이지만 성공한 이후에 그 성과를 조직에 퍼뜨려 성공이라는 폭풍에 조직이 휩쓸려 붕괴되지 않게 할 수습, 또는 언론에 회사와 제품을 알리는 건 홍보담당자가 하면 되겠지만 언론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에서 사과 등과 같은 수습은 CEO가 해야한다.

정리하면 빠른 실행에 이은 적합한 수습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에서 CEO가 맡은 역할은 많으며 그에 비례하게 크고작은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다. 그 모든 걸 모두 예방할 순 없다. 그 사실을 빨리 인정하고, 정확히는 CEO인 자신이 수시로 문제를 터뜨리는 폭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문제(issue)를 잘 수습할 수 있는 고민과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갖춰놓아야 한다. 물론, 더 좋은 방법은 조직을 성장시켜 CEO 자신의 일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여 폭탄 크기를 줄이고 CEO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다. :)


1. 이 직군의 특성이라기 보다는 내 성격탓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잠자다 전화를 받으면 가능한 한 잠든 티를 안 내려 하는데, 잠든 티를 내면 상대방이 미안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애초 안 받았으면 모를까, 기왕 받았는데 공연히 상대방에게 부담줄 필요는 없다.

게임 개발자로서 업계 최고 대우

군대 이야기처럼 게임 몇 개 만들어온 게임 개발자라면 하나씩은 흔히 갖고 있는 열악한 게임 개발 환경 경험 이야기를 나도 꽤 갖고 있다. 지하실 단칸방에서 김치를 적극 활용한 반찬들로만 구성된 식사를 직접 해먹기도 했고 작업용 컴퓨터가 부족해 주간과 야간 번갈아가며 일하는 등 다양하지만, 구구절절 다 이야기를 꺼낼 순 없으니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게임 업계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와! 나도 저렇게 재밌는 게임 만들거야!"

1990년 중반 인디 게임 개발자 시절부터 오랜기간 밤잠 이루지 못 하게 하던 게임이 참 많다. 울티마 시리즈를 하며 내가 만든 게임 세상에 나를 본딴 인물을 등장시키고 싶었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하며 롤플레잉 게임에 한글이 나온다는 사실에 감격 겨워했으며, 성검전설 3를 하며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좀더 구체화 된 목표를 잡기도 했다. 이외에도 날 설레게 하고 영감을 일으킨 멋진 게임이 참 많다.

게임 업계를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2007년에 잠시 게임 업계를 떠나기 전까지 약 8년 동안 게임 업계에 버티며(?) 게임을 만든 힘은 단 하나였다. 나도 저렇게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말겠다는 꿈이자 목표였다.

그래서일까? 발갛게 상기된 채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가만히 듣다보면 솔직히 별로 재밌을 것 같지 않은 게임도 많았지만, 자신의 꿈, 즉 자신의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함께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지난 날, 내가 게임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던 원동력은 재밌는 게임을,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이제 난 플라스콘에서 내가 그러했듯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하나쯤은 갖고 있는 개발자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재미있고 즐거운 조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신의 게임을 만들고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 최고 대우를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