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책 100권 읽는 목표를 달성하고, 후회한다.

1. 책 100권 읽기 목표를 달성하고, 후회하다

2008년 말에 2009년 한 해 동안 책을 100권 읽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목표는 12월 23일에 달성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기간을 정해서 얼마만큼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알고 보면 이미 여러 사람이 이런 다독을 권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이미 그런 권고를 알고 있었지만, 이해하고 마는 것과 경험하여 깨닫는 것은 다르다. 난 무엇이 다른지 직접 후회하려고 도전했었다.

2.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과 변화

1년에 100권을 읽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365일로 계산을 해도 3~4일에 한 권, 주 단위로 계산해도 1주에 2권은 읽어야 한다. 예전에는 한 해에 대체로 50~70권 정도를 읽어 왔으므로 예전보다 1.5~2배가량 “빨리” 읽어야 했다.

빨리 달리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달리는 습관, 달리기에 좋은 신발 등 여러 가지를 조정해야 한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00권을 읽을 방법을 구상했다.

2.1. 새로 고안한 방법

우리 뇌는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매우 잘 휩쓸리는 데다가 실제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상황에 몰입하면 가상인데도 마치 실제처럼 받아들여 강한 동력을 얻는다. 그래서 관심과 신경, 목표를 향하게 하는 대상을 눈으로 자주 보는 게 좋다. 가족사진, 목표, 사명 같은 것이 그렇다.

난 방 창문에 커다란 책 도장 종이를 붙이고, 이곳에 읽은 책 이름을 하나씩 잘 보이게 썼다. 일부러 만든 건 아니고,  우연히 어린이용 책도장 종이를 얻어서 요긴하게 썼다. “지금이 6월이고 40권을 읽었으니까 남은 6개월 동안 60권을 읽으려면 더 노력해야겠군”이라고 이성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헐... 아직 이만큼밖에 못 채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상황판을 보는 게 더 강한 동기를 부여한다.

또 하나는 책을 이어서 읽는 방식이다. 새 분야 책을 시작하면 그 분야에서 쓰는 표현에 익숙해져야 한다. 용어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문장 형식이나 낱말에 익숙해져야 그 분야 글쓴이들과 친숙해져서 책으로 글쓴이와 대화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유지는커녕 집중 상태에 빠지는 것부터 적잖은 비용이 필요하다. 기껏 익숙해졌는데 새로운 분야 책을 집어들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다시 집중 상태를 시작하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책을 관련 분야별로 이어서 읽는 건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2. 기존 습관을 보완

기존에 책 읽던 습관에도 변화를 줬다. 예전에는 여러 책을 한 번에 읽었다. 대중교통 탈 때, 자기 전에, 화장실에 있을 때, 혹은 이도 저도 아니어서 무척 애매할 때와 같이 상황에 따라 읽는 책을 따로 구분해서 읽었다. 하지만, 올해엔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한 번에 두 권을 읽는다. 하나는 집 밖에서, 다른 하나는 집 안에서 읽는다.

이러한 방법들은 평소 생활 습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고안한 것이다. 꼭 100권 읽기 목표 때문이 아니더라도 다소 산만한 독서 습관을 바꾸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100권 읽기, 즉 빨리 읽는 것이라서 계획하지 않았던 변화도 함께 찾아왔다.

3. 목표 달성을 노력하는 중에 찾아온 변화

3.1. 좋게 보는 변화

좋은 변화 중 하나는 시간을 좀 더 잘 관리하게 된 점이다. 바깥에서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책을 읽는다. 버스는 많이 흔들려서 앉지 않으면 읽기 힘들므로 지하철을 선호한다. 더구나 지하철은 자동차보다 시간 예측을 하기에 쉽고 편하다. 버스는 매 정거장을 의식해야 하지만, 지하철은 정거장 수에 2분을 곱하면 대략 도착 예정 시각이 되어 전화기에 알림 설정을 해서 시간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버스와 지하철로 갈 수 있고, 각 교통수단을 이용했을 때 걸리는 시간에 큰 차이가 없으면 일부러 지하철을 탔다.

시간을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시간과 일정을 관리하기 좋아진다. 혹자는 이렇게 시각 딱딱 맞추며 사는 게 피곤할 것이라고 하지만, 각 일정 시간을 예측하지 못해 각 일정 배치가 수시로 바뀌는 것이 훨씬 피곤하다. 책을 더 읽으려고 지하철을 더 선호한 행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꼼꼼한 시간 관리를 몸에 더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좋은 변화는 책을 읽는 행동이 무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에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가려우면 무심코 긁듯이 책을 읽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심코 책을 들어 읽게 됐다. 예전엔 책을 읽으려고 의식했는데, 100권 읽기 목표를 세운 뒤로는 짬짬이 나는 시간을 다른 데 쓰지 말고 책을 읽자고 더 강하게 의식했다.

의식 속에서 지속하는 행동은 무의식 속에서 이뤄지는 행동보다 몸과 머리에 부담을 준다. 의자에 앉아서 무의식 중에 다리를 달달 떨면 별로 지치는 기색도 없지만, 단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럼을 연습하려고 일부러 뒤꿈치를 들어 다리를 달달 떨면 금방 종아리에 쥐가 난다. 무의식 중에 책을 읽으므로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보다 머릿속 회로는 산소와 핏속 당을 덜 소비하는 것 같다.

물론, 특정 목적, 이를테면 드럼 베이스를 잘 두드려야 하는 목적에 기준을 두면 의자에 앉아 무의식 중에 다리를 떠는 행동은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무의식 중에 책을 읽다 보면 무의식 중에 문장을 흘려 넘기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3.2. 후회하게 만든 변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100권 읽기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잘못된, 혹은 안 좋게 보는 변화도 있다. 이 변화 하나 때문에 2009년에 책 100권 읽겠다는 목표 달성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바로 내용을 담은 묶음이 아닌 글자를 담아 묶어낸 물체로써 책을 읽은 것이다.

예년과는 달리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더 깊이, 그리고 넓게 접하려고 많이 읽는 게 아니라 단지 많이 읽으려고 많이 읽는 것이다 보니 시간 부담을 안게 되고, 그래서 자연스레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일이 많이 줄었다. 글을 익히려고 책을 읽기도 하지만,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몇 번이든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경우가 많다.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단방향으로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문을 표하며 양방향으로 소통해야 더 깊고 짜임새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내용을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책 속에 녹아들어 있어서 마치 책이라는 벽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쉽사리 보이지 않는 글쓴이를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책이라는 매개체와 책에 쓰여 있는 글자는 글쓴이의 생각을 재현한 기호와 물체일 뿐이다. 기호는 본질을 재현하려고 흉내를 낼 뿐, 결코 본질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글자에서 뜻을 얻는 데 그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글쓴이를 마주 대하여 그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본질을 읽어야 한다. 책 속에서 글쓴이를 찾을 수 없는 책은 둘 중 하나이다. 내가 책을 소화하지 못하여 글자라는 기호 벽을 넘지 못했거나 혹은 애초 글쓴이가 담겨 있지 않았거나. 후자에 속하는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4. 다시는 하지 않으리

2009년 12월 23일에 100번째 책을 덮으면서 100권 읽기 목표는 달성했다. 실은 50권째 책을 다 읽은 5월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100권에 담겨있는 수백, 수천만 글자는 다 읽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은 읽지 못했다. 앞으로 나는 절대로 정한 기간에 얼마만큼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적어도 상대방만큼은 만족스럽게 느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그런 소통 만족감을 느끼려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변치 않는 점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고,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 당장은 소통이 잘 이뤄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상대방이 느끼는 소통 만족감은 떨어진다.

소통 만족감을 높이는 좋은 방법으로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라 했는데, 사람은 상대방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으로든 본능으로든 누구나 이기성을 발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불필요한 정보는 최대한 걸러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적합한 정보만 걸러내서 듣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람은 걸러낸 그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인지하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같은 사실이나 사물, 즉 같은 현실에 있는데도 개개인은 서로 다른 현실을 사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미 형성된 자신의 현실과 세계관을 깨뜨리기란 대단히 어렵다. 누군가 자신의 세계를 건드리면 자연스레 공격받는다고 느끼고는 움츠러들거나 반발하게 된다. 상대방이 소통 만족감을 느끼게 하려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이란 결국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할 말”로 착각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은 말 시작부터가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고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곧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이런 소통도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일 아주 낮은 가능성에 기대야 한다. 이런 불확실성에 내 신뢰를 거는 게 과연 합리성 있는 것일까?

사회는 소통이라는 연결 끈으로 구성된 거대한 그물이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도시, 즉 사회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소통 수단 중 하나인 눈이 막혔을 뿐 다른 소통은 가능했기 때문이며, 이 소통으로 새로운 사회 규칙을 만들어갔다. 이말인 즉, 소통에 능할수록 사회에서 잡을 기회가 늘고 이뤄낼 가능성도 크다. 이 소통은 “해야 할 말”인 척하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담아서 전달하면 된다. 이 말이 너무 단순해서 시시하게 느껴지지만, 이 시시할 정도로 단순한 걸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다수 사람은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할 말로 할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진실하다고 생각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본다는 말은 신뢰, 즉 믿음이 형성됐다는 것인데 이 신뢰는 소통에서 대부분 이뤄지며, 상대방의 가치관(세계, 현실)을 지켜주는 선에서 내 생각을 전달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이 내게 신뢰를 품게 된다. 즉,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하기 쉬운 데 반해 다루기는 퍽 까다롭다. 하기 쉬운 이유는 말 시작점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이유는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많이 쓰면 대체로 내 신뢰가 깎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서 꺼낼 말이 일어나고, 그 뒷수습도 자신이 다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 뒷이야기는 “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아주 흔한데, 다른 사람 뒷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신뢰를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하는 것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나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아니라 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당장 개운해지려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차츰 자신의 신뢰도는 떨어질 것이다.

“해야 할 말”은 하기 쉽지 않지만 다루기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덜 까다롭다. 시작이 쉽지 않은 건 상대방이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맞춰 해야 할 말을 하면 그 이후는 상대방이 뒷처리한다. 말은 자신이 했으되 일단 말 시작점을 상대방에게 놓는 데 성공하면 그 이후 운영은 상대방이 맡아서 사실상 상대방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해야 할 말만 간결하게 조금하고 나머지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상대방은 충분한 소통을 나누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내가 한 말까지도 상대방은 자신이 한 말처럼 포용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고 싶은 말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로 다듬어서 해야 할 말에 담아내면 상대방은 솔직함 마저 느끼게 된다.

그 누구도 없이 자신만 존재하는 사회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이가 서로 이어져있는 이 사회에서 산다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둔, 즉 시작점에 둔 소통이 아니라 상대방에 시작점을 둔 소통을 하는 것이 좋다. 심리 저항선(이를테면, 자존심으로 가장한 이기심)을 이겨내면, 상대방에 생각과 말의 시작점을 두고 소통을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제하고 해야 할 말을 주로 한다면, 내가 말을 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말을 하게 한다면(실은 해야 할 말만 하면 자연스레 내가 말하는 빈도는 줄고 상대방이 말하는 빈도는 는다), 우리의 소통은 더 만족스러워 질 것이다.